컴퓨터를 시작할 때 페이징 파일 구성에 문제가 있어~ 해결법

컴퓨터/윈도우즈설치

 

증상

컴퓨터 부팅시 시스템속성창이 뜨면서 페이징파일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창이 나타나는 문제

SNAG-0001

원인

가상 메모리가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해결방법

레지스트 수정

시작>검색 상자> regedit를 입력하하여 레지스트리 편집기를 실행합니다.
아래 경로로 이동합니다.
[HKEY_LOCAL_MACHINE\SYSTEM\CurrentControlSet\Control\Session Manager\Memory Management]

DisablePagingExecutive 과 TempPageFile 라는 항목의 값이 1로 설정 되어 있는 경우 이를 0으로 변경하고 컴퓨터를

다시 시작하여 증상을 확인합니다.

Malware Zero Kit (mzk) 보조 악성코드 제거 스크립트

컴퓨터/윈도우즈 팁&정보

SNAG-0010

Malware Zero Kit (mzk) 보조 악성코드 제거 스크립트 ★

< 파일 내려받기 버튼은 본문 중앙, 기부 버튼은 본문 하단에 위치하며 사용 전 본문 내용을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동작 운영체제 : Microsoft Windows Vista, 7, 2008, 8, 2012, 10

경고 ! 타 사이트/카페/블로그/토렌트 등에서 배포/개작 및 상업적 이용 절대 금지 !

이 스크립트는 네이버 대표 보안 카페 <바이러스 제로 시즌 2>에서만 배포할 수 있습니다.

타 사이트에서 첨부 파일을 통한 배포 시, 권리침해 신고를 통해 게시물을 삭제 조치시키고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해당 도구는 무분별한 사용을 권장하지 않으며, 악성 증상이 타 보안 제품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시 사용해주세요.

★ 도구는 자동 업데이트 되지 않으므로, 필요할 때마다 내려받기(항상 최신 유지)를 통해 새로 내려받으세요! ★

SNAG-0011 SNAG-0012

◇ 파일(ZIP 압축파일)을 압축 해제 후 「 1. 사용 전 반드시 읽어주세요 」 문서 필히 열람 (매우 중요)

◇ 오탐지 및 치료 후 문제점이 발생했을 경우 「 3. 문제 해결 」 문서 참고 ◇

◇ 행동 방어 기능이 포함된 보안 제품의 실시간 감시 기능이 동작중일 경우 실행 중간에 차단 및 진단될 수 있음 (예외 처리 필요) ◇

SNAG-0013

[출처] Malware Zero Kit (mzk) - 보조 악성코드 제거 스크립트 (바이러스 제로 시즌 2) |작성자 ViOLeT

K590P노트북으로 쇼군2게임을 실행해보자

삼국지게임/기타
제일 먼저 V3의 실시간 검사를 해제해야한다.그렇지않으면 쇼군2실행파일을 트로이잔이라고 잡아서 실행자체가 되지않는다.

1,처음에러발생시
MSVCR80.DLL 가 없어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 파워포인트 등등 다른 프로그램들은 오류 안뜨고 잘 되는데

이상하게 엑셀만 시스템 오류가 뜨며 MSVCR80.DLL 가 없어 프로그램이 시작이안되는데 어떻게 해야되나요...

Microsoft Visual C++ 2005 SP1 Redistributable (x86) 을(를) 설치하시면 해당 문제는 해결됩니다

Download: https://download.microsoft.com/download/1/E/4/1E4D029E-1D34-4CA8-B269-2CFEB91BD066/vcredist_x86.exe

2,위의 1번의 에러를 해결했는데 Microsoft visual C++ runtime library error라고 해서

아래와 같은 에러 창이 계속 뜬다

원인은 Microsoft office 2010에서 제공하는 IME 입력기랑 프로그램 실행이랑 뭔가 호환이 안되는 모양이다

해결 방법은 아래와 같이 간단하다

설정에 들어간다

기본입력언어에서 한국어 - Microsoft IME 2010 대신에 한국어 - Microsoft 입력기로 바꾼다

(없으면 추가버튼을 눌러 한국어에서 microsoft 입력기를 찾아서 추가해주자)

적용, 확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실행해보면 아마도 될 것이다

이 문제로 며칠을 끙끙대며 실험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해결했다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독살

삼국지게임/기타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조선 청년 양부하(梁敷河)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부산의 반송 삼절사' 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에는 삼절사(三節祠)가 있다.
삼절사는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집성촌이었다.
조선시대 동래향임과 좌수들 중에 남원양씨가 많았으니, 옛날 남원양씨는 부산의 대표적 양반씨족(兩班氏族: 兩班 -> 고려 때 부터 ‘문반(文班)’과 ‘무반(武班)’ 혹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 ‘문반’과 ‘동반’은 모두 ‘문관(文官)의 가문’을 나타내던 말이고 ‘무반’과 ‘서반’은 모두 ‘무관(武官)의 가문’을 나타내던 말인데 조선 시대 이후 사대부 중심의 계급 체계가 고착화하면서 ‘지체나 신분이 높은 상류 계급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확대되어 동반(東班) + 서반(西班)을 합쳐서 양반(兩班)으로 부르게 되었다.)이었다.
부산의 남원양씨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이 이 삼절사에 모셔져 있으니 양지(梁誌), 양조한(梁朝漢), 양통한(梁通漢) 세 분이다.
지금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것은 부산의 반송 삼절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약력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산의 남원양씨중 숨은 큰 인물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양부하(梁敷河1580~1675)이다. 역사를 좀 안다고 하시분들도 "양부하"라는 이름이 머리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양부하의 일본에서 행적이 임진왜란을 끝나게 했다는 것이다. 양부하가 이들 삼절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삼절사의 간단한 내력을 보자.
★ 양지(梁誌, 1553 ∼ 1592): 경기도 파주인으로 적성현감을 거쳐 경기도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839년 삼절사 건립후 합사하였다.
★ 양조한(梁朝漢, 1555∼1592): 동래향교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성내의 정원루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정랑에 증직되었다 .
★ 양통한 (梁通漢, 1559∼?): 양조한의 아우로서 난을 피하여 두 아들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 중 순절하여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 양부하(梁敷河)는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서 순절한 양조한(梁朝漢 1530∼1592동래향교 훈도로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동래성내 정원루에 옮긴 후 순절. 호조정랑에 증직)의 손자이다.
당시 양조한은 아들 양홍(梁鴻 1555~1592)과 함께 위패를 옮겼고, 이 위패를 지키다가 왜병이 성내에 들자 자결 순절했다. 양부하는 당시 12살이었는데,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당시 양부하의 집은 가마실(釜谷 - 지금의 부곡동)에 있었는데 양조한의 처는 부자(시아버지와 남편)가 숨지자 손자 양태수(양부하의 동생)만을 데리고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의 고향인 밀양 무안면으로 피난을 갔다. 난리중에 양부하의 어머니는 실종되었는데 그 행방이나 성씨까지 실전된 상태이다.
양부하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27년만인 1619년(기미년 )에 39세의 장년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양조한의 부인이자 양부하의 조모는 그의 손자임을 알아보지 못 했다. 조모는 처음에 "내 손자가 아니다."라며 부인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는 이후 96세에 이르도록 장수하는데, 그는 평생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인 95세에 이를 밝혔는데, 그 이야기는 경천동지(驚 天 動 地 )한 것이었다.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독살에 관계한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조선중기의 학자 임상원(任相元: 1638~1697 형조판서 역임)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도 전해온다. 이후 연려실기술과 성호사설, 그리고 일본인 아오나기(靑柳綱太郞)가 쓴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부하는 일본에 강화사신으로 온 명나라 사람 심유경과 모의를 하여 왜적의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그 내용은 이하와 같다.
<< 심유경(沈惟敬, : ?~1597): 명나라의 사신으로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출생하였다. 명나라에서 상인으로 활동하였다가 1592년 인진왜란 때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일본과의 화평을 꾀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평양성에서 신기삼영유격장군(神機三英遊擊將軍)의 신분으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와 만나 화평 상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협상을 재차 진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니고야성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게 된다. 심유경은 이협상에서 농간을 부려 명나라와 일본 양국 사이에 심각한 불신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화평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7년 정유재란(제2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또다시 일본과 평화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기도하였지만 경상남도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만다.
그의 족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심유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 였던 석성이 추천해서 명나라의 장수 조승훈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다. 처음 조선 연합군과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강화 전담의 임무를 띠고 온 심유경은 할 일이 없었으나, 1593년 1월 이여송이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하면서 이여송의 주도 아래 기나긴 강화회담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 바로 일본어에 능한 심유경이 왜군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심유경은 왜군 진영으로 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며 절대 끝나지 않을 강화회담을 시작했는데 양쪽 진영에서는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고니시 유키나가를 설득 직접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으로 건너간 심유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게..
1.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건네준다.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두 조선 왕자를 귀국시킨다.
7. 조선의 권신이 앞으로 일본에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등 이었다. 강화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명나라는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1. 조선에서 완전 철군할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할 것.
..이라는 양국 서로가 도저히 타협점을 찾기 힘든 강화조건을 내건다.
그러자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려는데 동의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자신의 나라에 속여서 강화가 타협 되었다고 전했다...
심유경은 강화조건을 모두 속이고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오직 왜왕으로 책봉되길 바라며 대대로 명나라의 신하로 남아 조공을 바치겠다"라고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보내게 된다.
그때까지도 명나라가 자신이 내건 강화조건을 모두 받아드렸다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책봉서와 금인, 관복을 받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 사이소 죠타이가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분노를 하게 된다.(고니시유키나가 역시 겨우 목숨만을 구제했으며 정유재란에서는 1군이 아닌 2군을 몰고 재침공을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분노는 다시 한 번의 조선 재침공이라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후 심유경의 모든 실체가 탄로나 명나라 황실에까지 전해지며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병부상서 석정이 막아서며 다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다시 강화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하여 경상남도 의령에서 명나라 양원에게 붙잡혀 처형 당했다.>>
임진란 때에 동래 사람인 양조한(梁朝漢)과 양홍(梁鴻)은 부자지간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쳐들왔을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싸우다가 죽었는데 양조한의 손자였고, 양홍(梁鴻)의 아들인 양부하(梁敷河)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12살의 양부하(梁敷河)는 왜군에게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일본의 왕)에게 헌신하겠다.” 였다. 비록 어렸지만 자신이 살아야만 일본군에 죽은 조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 동래부민의 전몰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럼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야만 된다고 여겼다.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 - 소 요시토시)는 처음에는 이런 글을 쓴(앞으로 일본인으로 살겠다는..) 양부하를 의심하였지만, 그는 일본의 여러 섬을 거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쿄토 후시미성(伏見城)에 양부하를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낼 정도로 믿었다.
히데요시는 양부하를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니 양부하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鮮兒與日本兒同也 敷河垂頭流涕)..
히데요시는 통역하는 왜인에게 명령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 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 새워 양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는다.” 하였다.
이튿날 히데요시는 양부하에게 일본말로 물었더니 양부하가 일본말로 곧잘 대답하므로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히데요시는 그를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秀吉知敷河非賤人。而容貌鮮令。狎而愛之。常置左右。恩意甚厚)
히데요시는 항상 3층 높이에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방석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劍)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머리 위에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한창인데도 히데요시는 별로 할 일이 없었 보였다고 한다. 곁에 근신(近臣) 다섯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히데요시는에게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임진년)에 아들 하나(차남)를 두었다. 히데요시의 아들 이름은 토요토미  히데요리(秀賴:풍신수뢰)였다.
<< 강항(姜沆, 1567~1618)이 지은 간양록(看羊錄)에는 “히데요시의 근신이 히데요시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1596년) 가을에 양부하는 조선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이 심유경(沈維敬)이었다. 심유경은 도요토미와이 강화는 서로의 입장 차이로 도저히 합의안을 낼 수 없었다.
심유경은 이 전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 자신을 보러 온 조선인 양부하를 만나게 된다. 양부하는 도요토미 최측근에서 잔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후 양부하는 심유경과 친해져서 내왕하면서 양부하에게 히데요시를 죽이는 계획을 설명하였고 이에 양부하도 도요토미를 살해 할 모의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왜인들이 심유경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심유경이 크게 곡을 했다. (이는 양부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양부하가 히데요시에게 가서 "관백님. 중국사신이 곡을 합니다."하고 알렸다. 이상하게 여긴 히데요시가심유경을 만나보기를 원하니 양부하가 음실(蔭室=비밀통로)을 만들어 객관에서 궁궐로 몰래 오게 하여, 심유경과 히데요시를 만나게 했다.
유경은 좌석에 앉자마자 환약(丸藥)을 하나를 먹었다. 히데요시와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역시 약을 먼저 먹었다. 이를 본 히데요시가 유경에게 이상히 여겨 물으니 심유경은 “만리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으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합니다" 하였다.
히데요시는 “거짓이 아니냐?” 물으니 심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어찌 하겠소?” 하였다. 히데요시도
“나도 섬에서 돌아와 기운이 줄어든 듯 하니 하나 줄수 있겠냐?”라고 하자, 유경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 속에서 환약을 히데요시에게 주었다.
히데요시는 양부하를 시켜 약을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서(署)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秀吉令敷河取來。置諸掌中。熟玩之。丸有署字)
히데요시는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 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데 그만도 못하다.” 했다.
의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품속에서 이쑤시개(楊子)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너먼저 맛을 보아라.” 라고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꿀꺽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히데요시는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심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다. 실은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서서히 약하게 만드는 약인 것이다.
유경은 히데요시와 헤어지고 난뒤에 재빨리 객관에 돌아가서 다른 해독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아래로 내리게 하였다. ( 華使歸館。必飮他藥下之。再服又下之)
당시 양부하는 심유경과 히데요시 독살에 깊이 가담해 있었고, 이 독살 과정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일본과의 해결책이 쉽게 풀리지 않아 곧 조선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서서히 죽는 과정을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목격한 유일한 인물은 양부하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유경이 준 약을 먹고 난뒤 부터 사지에 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괴이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게 뜸을 뜨라.” 하고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였다.
어느 날 히데요시는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뒤 히데요시는 죽었다.
그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만나 독약을 먹은 것이 1596년 5월이었고, 죽은 것이 1598년 8월이다. 시간이 2년 정도 흘렀으나, 심유경이 쓴 독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히데요시가 노환으로 죽었다고 해도 별 할말은 없지만, 여러문헌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는 분명 독약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독약은 비소 종류를 독으로 썼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 양부하가 직접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히데요시의 내실체재 이후 과정은 양부하가 문지기에서 듣고 기록하였다. (自秀吉處內。敷河不得侍。此則聞諸其人者也)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양부하는 일본 서부의 대명 모리휘원(毛利輝元 - 모리 테루모토)의 사람이 된다.
1600년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모리휘원이 덕천가강(?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뒤 그 관할지가 축소되면서 번세(蕃勢)가 어려워졌다.
마침내 양부하는 모리휘원에게 귀국을 간청하고 모리휘원은 거느리던 조선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敷河間說輝元。請得西歸。輝元曰。吾壤削食少。不得以多養士也。許之)
모리휘원의 귀국문서 노첩(路帖)을 받은 양부하는 주변의 귀국코저 하는 조선인 82명을 모아 대마도를 거쳐 부산 감만포로 돌아왔다. (이 귀국에 대해 노포동 묘비는 100명이라고 했는데 숫자가 틀리고, 귀국포구가 감만포로 기록한 것은 일치한다)
염헌집(恬軒集)의 양부하전(梁敷河傳)에는 “양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돌아온지 57년이 흘러 96세이다" 했다. (時敷河三十九歲。萬曆己未也 。食吾粟者 五十有七年)
또 "그의 말중 지명은 왜어로 구술해, 해독할 수 없어 강항의 간양록을 참조 했다"고 했다. (名地名人。竝用倭語。不得譯而文。以看羊錄)
부산 동래출신의 소년 양부하는 명나라인 심유경과 함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독살하므로 조부 양조한과 아비 양홍의 전몰, 실종된 모친에 대한 복수를 한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으므로써 임진왜란도 끝난 것이다.
이런 쾌거가 당시에 밝혀지지 못한 것은 심유경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화 실패와 독살살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귀국 즉시 처형되었다. 그가 죽을 때 독살공작에 대해 진술했지만, 히데요시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사(明史)에서는 그를 간신이 아닌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양부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다시 열린 평화의 시대에 왜인들이 천하영웅으로 모시는히데요시를 자기가 암살 했다고 밝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57년이 흐른 뒤에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때 사실을 밝힌 것이다.
지금도 많은 한국관광객들이 일본 오오사카성(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업적 전시)을 찾아 관광하는데, 전시장 끝 부분에 필히 있어야 할,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청년 양부하와 명사(明使) 심유경에 의한 암살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사학자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암살부분을 필사적으로 숨겼는데, 이제는 밝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위대한 조선청년 양부하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의 묘가 있는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도로변에 동상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사실 남원양씨 문중도 양부하의 일본내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양부하! 그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쾌거를 이룬 안중근과 다를 바 무엇인가? 그리고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과 비추어 어디 하나 그의 공(功)이 빠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은 알고있고,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폐허로 만든 원흉 적장을 죽인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을 모른다? 이것은 하늘을 보며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암살관련 전말은 일본 경도의 명가 아도가(阿刀家)에 비전(秘傳)하는 문서 '비장인(非藏人)'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거짓 장계로 인해 심유경은 죽었지만(중국에서 충신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히데요시의 광기(狂氣)는 어느나라에도 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히데요시 암살로 계획을 수정하여 조선청년 양부하의 도움으로 목표를 달성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변절해왔다. 드마라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제 그의 신원도 회복해야 한다.
두번에 걸친 왜란을 끝낸이는 조선의 바다를 지킨 이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끝까지 전의를 불 태운 조선의병도 아니었다. 그럼 조선군과 파병 온 명나라군인가?
모두 아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복수에 불타는 조선인 양부하 이 두사람에 의해 임진왜란이 끝났다는 것이다.
양부하의 공은 충무공 이순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조부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그 끝은 조국이 7년간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 김구선생이나 수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과 같이 이 분이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조국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위대한 조선의 청년인 것이다.

이몽학의 난

삼국지게임/기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고 2년 뒤(1594년)에 두명에 서자출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한양에 사는 송유진과 충청도 홍성에 사는 기울어져가는 왕족의 서자 출신에 이몽학이다. 두 번에 반란으로 인해 선조는 거듭된 잘못된 판단을 하게된다....


1. 송유진(宋儒眞)의 난 

1594년 임진란이 일으난 2년 뒤인 갑오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과도한 부역과 과세로 피폐해진 남부지방에선 유민들이 속출하고, 왜군과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친 수 많은 군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험조한 곳에 매복하거나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특히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과 호서 지역에서 이런 도적떼가 성행했는데 수령들이 군사를 풀어 토벌해도 일시적인 대책일뿐 곧 다시 모이곤 해서 소탕에 몹시 애를 먹었다. 그때 상황을 <선조실록 47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선조실록으로 본 송유진의 난을 글로 옮겨 보겠다.
1) 선조  27년인 1594년 1월 8일
충청도에 도적이 치성하니 감사에게 잘 조치하라고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충청도 내에 도적이 점차 성하여 부자로서 조금이 나마 재곡(財穀)을 저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창고를 봉해 놓고 쓰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조짐이 우려됩니다. 내부의 급박함이 외적에 못지 않으니 은밀히 감사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미를 살펴 특별히 조처하여 후환을 근절하게 하소서.”
당시 송유진(宋儒眞)은 나이가 30세였고  한양에서 양반에 서자 출신이었다. 그는 저자거리에 무뢰배로 전쟁(임진란)을 틈타 군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사족(士族: 서울로 가서 벼슬을 하다가 정치적 격변기에 본향(本鄕)·처향(妻鄕)·외향(外鄕)을 따라 낙향하여 재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계층), 무인 일부를 끌어 모은 무리를 이끌고,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주변의 다른 도적떼들을 규합하며..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며 왜군과 싸우는 의병대장이라 자칭하였다..
어느 정도 세를 불리는데 성공한 그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등에 그들을 배치했다. 그러다 동료 '오원종'에게 도성의 수비가 허술하단 말을 듣고 일당들과 모의해 1월 10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아산, 평택 지방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약속한 다음 광해군이 이끌던 분조(分朝)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냈다.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 현재 하남성 기현(淇縣). 고대 중국 상(商)나라의 주왕(紂王)과 반란군 주 희발(周 姬發-무왕(武王)) 마지막 전투 장소)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 고대 중국 은나라 말기에 사람)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武: 하(夏)의 걸왕(桀王)을 몰아낸 탕왕(湯王)과 은(銀)의 주왕(紂王)을 몰아낸 무왕(武王))에 빛이 되리로다.
송유진(宋儒眞) 일당의 모의는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에 의해 조정에 보고 된다.

2) 선조 27년(1594년) 1월 11일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송유진 역모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柳徵)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木川)에 사는 교생(校生) 석경천(石擎天: 당시 14살)이 「천안(天安)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宋望器)·준기(俊氣)와 그의 아비 송흥수(宋興壽)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同郡)의 유춘복(柳春福)·송연복(宋年福)·박순개(朴順介)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同郡) 사람들에게, 적장(賊將)의 성(姓)은 이씨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靑溪山)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春川), 해주(海州)에 각각 1진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조정에선 병기를 관리하는 관리인 송망기(宋望器)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민감히 반응해 즉시 선전관(宣傳官: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형명(刑名), 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 시위(侍衛)?전령(傳令), 부신(符信: 나뭇조각이나 두꺼운 종이에 어떤 글자를 쓰고 도장을 찍은 뒤에 이것을 두 조각으로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게 주고 한 조각은 보관하였다가 뒷날 그것을 서로 맞추는 것으로써 어떤 약속된 일의 증거로 삼은 물건.)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武官職))에게 금군을 딸려 파견해 송망기(宋望器)를 추적하게 했다.
병사 변양준(邊良俊)과 순변사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이 있는 지역을 순찰하면서 기회를 보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한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적을 수색하기 위해 방어사 변응성(邊應星)에게 순찰을 핑계로 은밀하게 청계산 일대를 정찰할 것을 지시하였더.
해서민을 보살피기 위해 당시 황해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유홍(兪泓)에게도 이 사실을 즉각 전달해 도내 군사 훈련 상황과 병기 제작 현황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하게 하고, 황해병사 조인득(趙仁得)을 시켜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날뛰던 도적떼를 긴급히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발빠른 대응이 무색하게 다음날 송유진(宋儒眞) 과 그 일당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다.


3) 선조  27년(1594년) 1월 12일
송유진(宋儒眞) 등을 체포한 임달신·홍응개 등을 시상하다
적정(賊情)을 진고(進告)한 사람인 직산 좌수 임달신과 적장 송유진(그외 심희수, 오원종, 유춘복, 김천수등)외 10명을 체포한 사람인 홍응개·홍난생·홍우·신계축·홍찬·김응추·홍각등에게 차등 있게 상직(賞職)하였다.
송유진(宋儒眞) 과 그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선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송유진(宋儒眞) 이 난을 일으키며 판서를 사칭했는데 선조는 이것이 그의 위에 다른 수괴가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이에 성문과 한강의 경비태세를 더욱 철저히 할것을 명하는 한편 남산위에 군사를 보내 사방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병부는 장사들을 뽑아 대오를 나누어 대기하게 했으며 각종 병기를 숫자로 헤아려 궐내로 반입하게 하고 병기의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와 왜군이 군량을 쌓아놓던 용산창에도 군사를 배정해 지키게 했다.
어느 정도 조치가 치해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구구한 논쟁이 벌어진다. 사헌부에선 죄인들을 즉시 서울로 압송할것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송유진(宋儒眞) 일당을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변고가 생길 수 있고 (선조 생각처럼) 그 곳에 적의 괴수가 있다면 압송을 미루고 군사를 풀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선다.
선조는 사헌부의 손을들어 선전관, 금군, 금부도사를 파견해 수로를 통해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해오게 한다.
죄인들이 압송되어 오기 며칠전인 1월 17일, 비변사에서 의병장 이산겸(충청지역 의병장으로 토정 이지함의 서자)을 반군의 수괴로 지목한다.


4) 선조 27년(1594년) 1월 17일
비변사에서 송유진(宋儒眞) 역모의 괴수로 이산겸(李山謙)을 지목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초사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보령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李山謙)인 것 같습니다. 산겸(山謙)은 일찍이 의병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산겸(李山謙)은 충청도 보령출신으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의 서자로, 임진년에 조헌(趙憲)의 의병군에 참여했으나 2차 금산전투(錦山戰鬪)에는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헌 군(趙憲 軍)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온 인물이었다.
왜군과의 싸움에선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몇번이나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나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송유진이 한창 난리 피울 때는 그는 전라도에 있었다. 보령출신 이씨가 자기 혼자만 있는것도 아닌데 의병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있어 역적수괴로 지목 되었다....
이산겸(李山謙)의 체포명령이 떨어지고 1주일 뒤 대궐뜰에서 송유진(宋儒眞) 일당의 국문이 시작된다.
송유진(宋儒眞)은 반란수괴는 이산겸(李山謙)이고, 자신은 아이들 모아놓고 훈장 노릇하다 어쩌다보니 말려들었다고 발뺌했으나 그러나 다른 주모자 격인 김천수(金天壽), 오원종(吳元宗), 유춘복(柳春福)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宋儒眞)으로 밝혀진다.
이날 선조는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李山謙)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宋儒眞)이 진짜 괴수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홍우(洪瑀), 홍근(洪瑾: 송유진의 일당이었으나 마음 바꿔 송유진을 체포한 사람)도 이산겸(李山謙)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하였다.

5) 선조 27년(1594년)1월 25일

다시 열린 국문에서 '도성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사 1천 명으로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라고 바람넣은 사람은 오원종이며 침술이 뛰어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그가 사람들 끌어들이는데(혹은 낚는데) 활약 했음이 드러났다.
2차례에 걸친 국문끝에 송유진 일당이 말만 번지르르 할뿐 그저 규모가 좀 큰 도적떼에 불가하며 그나마도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선조는 그들을 모두 능치처참에 처하고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분배했다.
남은건 송유진 일당에게 속았거나 허위진술로 억울하게 연류된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등의 처리 문제였다.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석방하였다. .

6) 선조 27년(1594 년) 2월 6일
그러나 송유진 역모와 관련된 죄인 이산겸 등을 친국하다
(중략)
(의병이 좀처럼 모이지 않아)동궁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담양을 거쳐 김덕령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나를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내가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내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우리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산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유진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을 제대로 가려내기 위해 불러올린 홍근등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선조 본인 입으로도 괴수는 송유진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7) 선조 27년(1594년) 2월 14일
충청도 도적(송유진 역옥)과 관련된 죄인을 친국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지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의병 모집)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선조) 이르기를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선조)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로 돌아가겠는가. 송적(송유진)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후 이산겸은 압사(모래에 묻어 고문하는 것)·낙형(불에 달군 쇠붙이로 몸을 지지는 것) 등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으나 사실은 그가 의병장으로서 이름이 나 죽은 것이었다.
선조는 그가 무죄임을 알고도 죽였고, 바닥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잘못된 판단을 했다. 선조는 역적입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거 뻔히 알면서 철천지 원수인 왜군과 싸운 의병장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린다. 일본 장수들이 해야 할일을 조선왕이 대신 팔 걷어 붙이고 하고 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임금이 말이다..

2. 이몽학의 난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낙향한 왕족의 서얼 출신이다. 그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지역 사람이다. 왕족이라, 그리고 서얼이라서 조선이라는 사회에서는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개인적으로 나라에 반란을 했으니 당연 그렇게 평하리라 생각됨.) 그는 끝내 그의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기울어져 가는 왕실의 서자가 임진왜란 중에 반란을 일으킨다. 바로 이몽학의 난이다. 
임진왜란 때 그가 충청도에서 종군할 때에 조련장관(操練將官)이 되었다. 그는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머물면서 뒷날 반란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당시 조정에서는《기효신서(紀效新書:명대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병서)》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다.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庶人)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였다.
**. 척계광(戚繼光-1528년∼1588년:명나라 장군)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명대(明代) 해상무역 봉쇄로 인해 명과 조선의 해안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었다. 척계광
(戚繼光)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조선의 이순신만큼이나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사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중국에선 만력위국조선전쟁(萬曆爲國朝鮮戰爭)이라 부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무비(武備)를 소홀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선조(宣祖)가 한성(漢城)을 버리고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서야 겨우 명(明)의 구원군을 맞게 된다.
1593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선조가 제독영에 직접 찾아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지난 전투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이겼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자 이여송이 대답하길 “앞서 온 북장(北將) 조승훈(祖承訓)은 여진족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전쟁에 불리하였으나 지금 제가 와서 사용한 병법은 곧 왜적을 방어했던 척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했기 때문에 전승(全勝)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은 기마병인데 비해 남방 왜구들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전술이 달랐던 거다. 이여송 제독은 척계광
(戚繼光)의 무예와 전술로 훈련된 남방의 절강군(浙江軍)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가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이여송이 군사비밀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선조는 역관(譯官)에게 몰래 영(令)을 내려 이여송 휘하를 매수하여 그 비급을 구한다. 그리고는 유성룡(柳成龍)에게 책을 보이며 해독하게 했으나 군사(軍事)를 모르는 그도 알 길이 없었다. 하여 토론을 거듭한 끝에 병법과 무학에 밝았던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추천 받는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해독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여송 휘하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의리가 있어 유성룡에게 “우리 명군이 돌아가면 조선이 홀로 어찌 지키겠소? 그러니 명군이 돌아가기 전에 기회를 봐서 군사 조련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권한다. 이에 유성룡이 서둘러 한교를 낭관(郎官)으로 삼고 70명의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낙상지 휘하 병사 10명을 교관으로 삼아 밤낮으로 창(槍), 검(劍), 낭선(狼?)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이들이 조선군에 척법(戚法)을 가르쳐 왜적들과 싸웠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군은 척계광
(戚繼光)의 사(射, 궁수), 포(砲, 총포수), 감(?, 창검수)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배우고, 1595년에는 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 호대수(胡大受)에게서 직접 삼수군(三手軍)이 훈련을 받는다. 한교 역시 유격장군 허국위(許國威)에게 창법(槍法), 패법(牌法), 선법(?法) 등을 물어 척계광(戚繼光)의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를 따로 모아 책으로 편찬하니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武藝書) <무예제보(武藝諸譜: 선조 31년-1598년)>다.

이와 영조35년(1759년)에 만들어진 '무예신보(武藝新譜)'를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등이 보강하여 4권 4책으로 '무예24반(武藝二十四般)'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종합적인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 **.
그들은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부대에 소속되어 충청도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심이 이반하여 백성들이 탄식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고, 크고 작은 고을의 방비가 모두 허술함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한현(韓絢)은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이몽학(李夢鶴)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무량사(無量寺)의 굴 속에서 중들과 함께 깃발과 무기를 만들었다. 그때 충청도에는 흔히 동갑회(同甲會)를 만드는 유행이 있었다.
"동갑회(同甲會)란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甲年)을 써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친목 모임이다."
이몽학(李夢鶴) 등은 그들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사람들을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이와 같이 무량사(無量寺)에서 군대를 모은 후 출병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치 대장군처럼 깃발을 세우고 의자에 앉아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미리 정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선동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그들에게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무리들은 모두 좋다고 환호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추앙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승려와 무리를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높은 관직을 나누어주니, 벼슬을 하지 못한 양반 자제와 양반의 서자 그리고 마을 무뢰배들이 모이 시작하였다.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전 준비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 이몽학(李夢鶴)은 1597년 7월 6일 밤에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승려 능운(凌雲)·사노 팽종(彭從) 등과 함께 1천여명의 반란군을 동원하여 홍산현(鴻山縣: 부여군 홍산면)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은 데 이어 또 임천군수(林川郡守)박진국(朴振國)도 사로 잡았다.
이들은 모두 항복하여 이몽학(李夢鶴)에게 붙었으므로 이몽학(李夢鶴)은 그들을 높은 빈사로 대우했다.
그들은 7월 7일 정산(定山: 청양군 정산)을 함락시키니, 현감 정천경(鄭天卿)은 몸만 빠져 도주하였다.
이어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 충남 청양군)을 함락하자 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주했고..
9일에는 대흥(大興: 예산순 대흥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3일 후에야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李時發)은 홍산에서 일어난 변란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합동작전을 펴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반란군은 거사 3일만에 6개 고을을 함락시켰 기세가 대단하였다. 수령들은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반란군의 호령에 따랐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반란군을 대접하였고 다투어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란군의 수는 한때 수 만명에 달하였다.
반란군은 “의병대장 김덕령·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돕고, 병조판서 이덕형이 한양에서 내응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나라 전체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리게 되었다.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 같은 자는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었다. 그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하였고, 반란군이 도착하자 모든 공문서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또 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예 그의 동생 3인을 반란군에게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짧은 기간에 6개 군현을 점령하자 용기백배하여 “이 기세를 몰아 곧장 한양으로 향하자”라고 큰소리 쳤다.

그래서 부근에서 제일 큰 고을인 홍주목(홍성)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원래 이몽학(李夢鶴)의 모사였던 한현(韓絢)은 영악스럽고 꾀가 많았다.
그는 이몽학(李夢鶴)에게 “승승장구하는 바람을 타고 곧장 서울로 침공하는 것이 상책이요, 주위의 성곽 없는 약한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견고한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현(韓絢)은 초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고 없었는데, 이몽학(李夢鶴)은 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곧장 홍주를 공격하다가 대패하게 되었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찍부터 명망이 높았으며, 행실이 청렴결백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홍주목사에 제수되자 정성을 다해 방어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래서 왜적이 홍주성에 쳐들어오자 단번에 무찔러 흩어지게 함으로써 충청도 지역을 안전하게 지켜낸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반란군의 침입을 당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을 모으는 한편, 그곳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박명현(朴名賢)과 전 병사 신경행(辛景行) 등을 불러 성을 지킬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우선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청야작전이다.그대로 놓아두면 적군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홍주목 인근의 남포 횬감 박동선(朴東善)은 변란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려 수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사 최호(崔浩)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고 난색을 표했다.
박동선(朴東善)은 큰 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따지는가”고 윽박지른 끝에, 드디어 수영(水營)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홍주목을 후원하였다. 또 보령현감 황응성(黃應聖)도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합세하였다.
홍주성은 이들 구원병을 얻자 크게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밤이 되자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에 횃불을 벌려 성에 세워 성 안팎을 환히 밝히고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반란군은 관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기세를 올리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어둠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몽학(李夢鶴)은 “한현(韓絢)이 오게 되면 목사의 머리를 베어서 깃대에 매달아놓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이튿날에는 군대를 이끌고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 길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장차 김덕령·홍계남의 군대와 합류하여 곧장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떠벌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도중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 틈을 노려 박명현(朴名賢)·최호(崔浩) 등이 바짝 반란군을 추격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또 전주 판관의 부하였던 윤성(尹誠)이 적진에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다”고 선무공작을 했다.
연속적인 패배로 반란군은 더이상 이몽학(李夢鶴)의 말을 믿지 않고 각자 자기들의 살 길만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중 김경창·임억명·태근 등 3인이 배신하여 이몽학(李夢鶴)의 막사로 난입해 누워 있던 그의 목과 사지를 베어 토벌군인 홍가신(洪可臣)한테 받친다. 토벌군으로 참여하렸든 김덕령은 이몽학(李夢鶴)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덕령은 군대를 돌린다.
이몽학(李夢鶴)이 죽자 반란군은 일시에 흩어져 버린다.
머리와 수족이 잘린 이몽학(李夢鶴)의 시체는 소금에 절여 한양으로 압송되어, 종로 철물전 앞에 3일 동안 효수된 후 사방으로 보내 전시되었다.
이몽학(李夢鶴)의 책사 한현(韓絢)은 반란군의 실패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군으로 도망쳤다가 면천군수 이원(李援)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그는 결국 능치처사에 처해졌는데, 심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었다.
한현(韓絢)의 아들 한의연(韓毅然)은 역시 당고개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삼촌인 이익과 김양호의 삼촌인 김환생, 한현의 조카 한호연 등은 모두 삼수와 갑산 지역으로 귀양갔다.
이몽학(李夢鶴)이 살던 집은 파가저택되었고, 그가 살던 홍산현은 혁파되고 말았다. 이때 능지처사당한 사람이 33명이었으며, 서울로 송치된 자는 1백여명이었다. 처형된 자들의 가족든 모두 법에 따라 연좌시키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진압되자 조선 정부는 반란 수뇌부의 집을 늪이나 논으로 만들어 버리게 하고, 연루자 색출을 마을 단위로 철저하게 진행한다.
이과정에서 특별히 반군에게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도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한다.

감독 선조, 주연 정철의 작품인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처럼..

(☆. 기축옥사의 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5)
임천군의 전태수, 박진국은 한술 더 떠서(자신도 반란군에게 투항한 주제에..) 반란군 가담자들을 근거없이 고발해서 이러한 피해를 더욱 키워버리고 만다.
조정에서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졸개 중 한 명이  "최담령(崔聃齡: 의병장김덕령 휘하에 부장), 홍계남(洪季男: 안성지역 의병장이자 토벌군의 장군 중 한명), 김덕령(金德齡: 전라도 지역의 병장)"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誣告: 없는 사실을 꾸며서 남을 고발·고소함)했다.
그리고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함경도 영원군수) 등을 모두 끌고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대부분 무고였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는데, 김덕령(金德齡)만이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이봉학(李夢鶴)의 난을 처리하는 과정에 토벌군 신경행(辛景行)의 모함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죽음으로 내몬다. 무과에 당당히 급제한 정식 장수인 신경행(辛景行)은 후방에 배치되어 비정규군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평소 불만이었다.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다는 죄명으로 평소 불만이 많았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체포하였고, 마침내 8월 4일 반란수괴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압송당하여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우의정 정탁(鄭鐸) 등의 구명, 탄원노력에도 불구하고 형문은 계속되었다.
1596년 8월 21일까지 보름이 넘도록 선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그에게 6회 연속으로 직접 형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몽학(李夢鶴) 반란이 의병들을 사칭하여 역모를 꾀한 것 때문에 김덕령(金德齡) 같은 의병장 출신 인사들을 이 때 부터 눈에 가시처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柳成龍)은 김덕령(金德齡)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西人)인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金德齡) 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20여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金德齡)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춘산곡>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김덕령(金德齡)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崔聃齡)은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평생을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김덕령(金德齡)은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죄가 죄인지라 사후 무덤을 문중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金德齡)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金德齡)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수령들도 탄핵을 당하였다.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지경을 침범하지도 않았는데도, 제 스스로 먼저 겁을 내어 그의 하인들이 반란군에게 무기를 실어보내는데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반란군이 쳐들어와 문서를 펴놓고 읽을 적에도 그대로 듣고 있다가 마치 애걸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엿다. 이 때문에 그는 처벌을 받았다. 임천군수였던 박진국(朴振國)과 홍산현감이었던 윤영현(尹英賢) 등은 뚜렷한 처벌 조항이 없었지만, 수령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반란군에게 협조한 죄목으로 치죄하게 하였다.
홍산의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서울로 잡아오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그가 현지에 머무르면서 반란군의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난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대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하여 승지 유희서(柳熙緖)를 보내 반란군의 협박에 못이겨 협력한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선포하여 나머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포상했는데,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자들도 모두 공신으로 인정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국왕을 호위한 관원들은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봉하였고, 명나라에 군량을 주청하러 간 신하들과 왜적을 무찌른 장군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았고,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관원들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봉하였다.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청난공신 가운데 홍가신(洪可臣)은 1등,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는 2등,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는 3등에 봉해졌다.  이몽학(李夢鶴) 의 목을 벤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 태근(太斤)등은 이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종 2품에 해당되는 당상관급인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 "이몽학의 난"은  영화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만들어 졌다. 역사와는 좀 차이가 있지만.. 


링크를 걸겠다. --> http://dramabank.net/video.code/td/?code=fdcb51ff572ac8170685a651c397875314dcd8c516e61258fc3ff1474f755de1507e1d05c725aacc58f78a4716ab7029d160832dbe80486a7846783cec640e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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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와 17장수들의 개인별 업적

삼국지게임/기타

현세대가 보기 편하게 순번을 매긴다 공과가 더하고 덜한 의병장수를 뜻함이 아니다

1. 망우당 곽재우 장군(별도의 공적을 등재한바 있어 생략)

2. 영장 윤탁(尹鐸) 장수에 대하여

1554년(명종 9)∼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성원(聲遠), 호는 구산(龜山). 합천 삼가 출신. 언효(彦孝)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정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박사겸(朴思謙)·박사제(朴思齊)·노순(盧錞)·조계명(曺繼明)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많은 공을 세웠다.

정암진전투(鼎巖津戰鬪)에 이어 개령·김산(金山)·지례 등지에 출몰하는 적을 치는 의병장 김면(金沔)을 도와 분전하는 한편, 웅천(熊川)·창원·김해·고성·사천의 적이 진주를 공격할 때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참전하였으며, 1593년 제2차진주혈전에 참가하여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촉석정충단(矗石旌忠壇)에 병향(竝享)되고, 삼가의 구연서원(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3. 도총 박사제(朴思齊) 장수에 대하여

1555년(명종 10)∼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현(景賢), 호는 매계(梅溪). 경상도 삼가 출신. 이조참의 우(優)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은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 권양(權養), 권제(權濟)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삼가의 윤탁(尹鐸)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군사와 합류하여 낙동강 좌안지방의 여러 고을 방위와 수복에 힘써 공을 세웠다.

한때 경상우도 감사 김수(金睟)가 곽재우를 모함하자 격문을 돌려 구원하는 데 힘썼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4. 수병장 오운(吳澐) 장수에 대하여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5. 수병장 이운장(李雲長)에 대하여1541(중종36) ~ 1617(광해군9년)

자는 희서(希瑞)이요, 호는 죽헌(竹軒)이며, 의령(宜寧) 유곡에서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1년(1568)에 좌부장(左副將)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빛나는 의병활동을 하였으므로 전 목사 오운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수병장(收兵將)이란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 의병이 정암진 즉 솥바위 나루를 수비(守備)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입하자
鼎巖津(정암진)에서 倭敵(왜적)을 殲滅(섬멸)하고 戰死(전사)하여 宜寧郡民誠金(의령군민성금)으로 鼎巖津(정암진) 戰死地(전사지)에 殉節戰跡碑(순절전적비)를 建立(건립)했다
그는 무공(武功)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의 증직을 받았다.

6. 수병장 배맹신(裵孟伸)

자(字)는 장숙(壯叔) 호(號)는 력봉(력峰) 만호 휘(諱) 경림(景霖)의 차남이다.
공의 조상은 대대로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세거하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기상이 장웅(壯雄)하며 재예총명하였다.
조부게서 정학(庭學)하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동문수학하였다.
공은 부친에게 무예를 익혔는데 그중 궁마술(弓馬術)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조총(鳥銃)을 난사하면서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하자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공등은 분기충전하여 세간리 마을 앞 현고정(懸鼓亭)에게 모여 창의를 맹세하고 북을 두드리며 “국난을 구출하자, 의병에 앞서자, 죽음을 맹세하자.” 하고 외쳤다.
정암진 전투 및 영산, 창녕전투에서 공은 항상 선봉장으로서 홍의장군 곽망우당을 도와 군졸을 지휘하며 왜적을 격멸하여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왜적의 난사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의 선봉장으로서 세운 혁혁한 전공과 국가를 위해 순절한 충절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1677년(숙종31)에 공에게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7. 수병장 심대승(沈大承) 장수에 대하여

1556년(명종 11)∼1606년(선조 39),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보(德甫), 호는 이안(伊安).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박필(朴弼) 등 의령(宜寧) 고을의 장사들과 친족, 하인 등을 모아 의병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진주 싸움 때도 구원군의 선봉장으로 참가하였다.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을 받았다.

8. 독후장 정연(鄭 演)장수에 대하여

삼가현에서 살고있다가 이웃 고을인 의령(宜寧)에서 곽재우 장군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자 곧 달려와서 의병부대의 독후장(督後將)이란 중임을 맡아 빛나는 활동을 하였으며
벼슬은 첨중추(僉中樞)에 이르렀다

9. 돌격장 권란(權 鸞)장수에 대하여

자는 자인(子仁)이요 호는 대수헌(大樹軒)이며 의령(宜寧)출신이다.
그는 곽재우 의병부대의 돌격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가장 용감하게 선두에
빛나는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벼슬은 군위현감(軍威縣監)
그리고 좌참찬(左參贊)의 증직을 받았다.

10.  조군 정질(鄭蛭)장수에 대하여

초계인이며 삼가현 육동에서 살았다. 그는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치밀한 성격과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그리고 이곳 지리에 특히 밝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1. 전향 노순(盧錞) 장수에 대하여

1551년(명종 6)∼미상. 조선 선조 때 의병장.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협(子協), 호는 매와(梅窩). 초계 출신.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을 보고, 박사제(朴思齊)·허자대(許子大) 등과 함께 군사 800여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의령의 곽재우(郭再祐)부대에 합세, 그 휘하에서 군량보급 참모를 맡아 왜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이듬해 영변부사를 지냈다.

12. 치병 강언룡(姜彦龍) 장수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문(汝文), 호는 초정(草亭).

선조 때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항쟁하여 의령·삼가(三嘉)·합천(陜川) 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의령의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13. 전군 허언심(許彦深) 장수에 대하여

1542년(중종37년) ~ 1603년(선조37년) 호는 압호정(壓浩亭)이요. 의령(宜寧)현의 가례(嘉禮)에 살았으며 곽망우당의 매형(妹兄)이었다.

그는 창의기병(倡義起兵)할 때 많은 곡식과 가동(家 )등을 내놓았으며 의병부대의 군향(軍餉)을 관장 했었다. 그는 공로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4. 군기 허자대(許子大) 장수에 대하여

1555년 (명종10년) ~ ? 자는 이화요(而化)요, 호는 평호정(平湖亭)이며 삼가출신이다.

곽재우 의병부대에서 그는 군기(軍器)의 제조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15. 기찰 심기일(沈紀一) 장수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남중(南仲). 만천(萬川)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키니, 이에 가담하여 왜적을 토멸하는 데 힘썼다.

특히 정암진(鼎巖津)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후일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 복병 안기종(安起宗) 장수에 대하여

1556년(명종 11)∼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응회(應會),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였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가 겸전한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고을의 천거로 사옹원봉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판관이 되었다. 나라에 외환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군수물자의 남용을 막고 경비를 절감하여 병기의 수선과 확보에 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화왕산성(火旺山城)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당쟁의 제물이 되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으나, 원래 행상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죽은 뒤에 논공행상에서 공적에 비하여 포상이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7. 군관 조사남(曺士男) 장수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능(百能).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고 의기가 있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흩어지니, 경상도 일대가 적군에게 유린되었다.

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5, 6일 만에 창녕·현풍·의령·영산 등지가 모두 적군에 의하여 분탕되자 지방 의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의령·창녕·현풍·삼가·초계·합천 등지를 전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지산(砥山)싸움에서 순국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승지에 추증되었다

18. 군관 주몽룡(朱夢龍) 장수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 신유)~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금산군수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흩어지는 백성을 모아 병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니 적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 등 경상도지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도 강덕룡·정기룡 의병장과 자주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삼룡장군(三龍將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 한때 임천·청양·대흥(大興) 등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때 반군들은 성세(聲勢)를 올리기 위하여 유명한 인물을 들어 동사자(同事者)로 선전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한때 연루자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죽은 뒤 형조판서에 추증되고 태인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안드로이드의 개념 설치로 듀얼OS 사용!

새소식

안드로이드의 개념 설치로 듀얼OS 사용!

안드로이드(Android-X86)의 개념 설치로 듀얼OS 사용하기!

왜 "개념"이 붙었나 하면 무작정 따라 하기로 삼일 고생한 저 같은 사람 되시지들 마시고! 그 작동 원리를 알고 설치하여 한 방에 끝내 보시라 굽쇼! ㅡ,.ㅡ

태블릿 PC를 사려고 찾아보니 윈도+안드로이드의 듀얼부팅 태블릿들은 사양이 너무 저급이다. 높은 사양 태블릿들은 안드로이드 앱 개발에 필요한 각종 센서가 대부분 내장되어 있지 않다

그냥 각종 센서가 내장되어 있고 윈도 OS나 OS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태블릿으로 찾던 중 적당한 가격의 윈도8이 기본으로 설치된 ASUS T200TA를 샀다.

[하이마트] ASUS 29.5cm 노트북 T200TA-CP001H [INTEL Quad-Core Atom Bay Trail-T,Z3775]

이녀석을 윈도우10(32 Bit)으로 크린설치 하였고, 여기에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기 위하여 여러 방법의 프로그램을 설치해 보았다.

블루스택(BlueStacks TV), DuOs(AMIDuOS), 가상서버 버추얼박스(Virtual Box) 등은 모두 윈도 내에서 프로그램같이 사용할 수 있는 비교적 간편한 방법의 툴 들이며 맘에 안 든다!

그러나 휴대전화기와 같이 단독기계로 사용할 수 있는 Linux의 GRUB를 설치하여 AndroidX86을 사용하면 된다.

이거다~ 구글링하여 설치하는데, 이 블로그 저 블로그 거기서 거기고 같은 말만 카피 되어 있고 낑낑 삼 일 이나 걸려 설치는 했는데 이건 너무 힘든 길인 것 같아 개념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차분히 이해 하시고 따라 하시면 어떤 기종의 컴퓨터나 노트북, 태블릿PC등도 안드로이드 듀얼부팅에 성공 하시리라 봅니다.^^

먼저 준비물 4가지

1. 미니툴 파티션 마법사 MiniTool Partition Wizard ( 다운, 제작사홈피 ) : 드라이버 내의 파티션을 추가/삭제/수정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2. Ext2Mgr ( ext2파일시스템 드라이버 ) : 우분투(혹은 리눅스)의 드라이버 포맷은 Ext2, 3, 4등이 있는데 이 형식으로 포맷된 드라이버의 내용을 윈도우에서 볼수 있게 한다. 물론 쓰기도 가능하다.

( *** 윈도우에서 사용하는 FAT32포맷 형식도 리눅스에서 사용 가능하다. 안드로이드 설치에는 필요 없을수 있다. )


3. Notepad++ ( grub.cfg 편집용 ) : C, C++, Java등의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고 여기에서는 리눅스환경인 GRUB를 설치한뒤 부팅메뉴를 만들어주는 grub.cfg파일의 수정이 필요할때 사용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 *** 리눅스의 .cfg파일은 이진파일로서 일반 텍스트편집기(메모장, 노트패드 등)로는 직접 읽어볼 수는 없는 "Configuration" 파일 이다. 안드로이드 설치에는 필요 없을수 있다.)


4. 부팅용 USB 드라이버 : 4G이상이면 될것 같다. 아무거나....(안드로이드 설치 이미지 파일 Android-X86-xxx.iso파일은 500MB도 채 안된다. 설치하면 버전에 따라 600~900MB 정도되는데 4G 이하의 USB드라이버는 구하기 힘들것 같아 그냥 4G로 표시한것임 ㅎㅎ)

개념 잡기

구글링해서 여러 곳의 듀얼OS설치 방법을 봐도 위의 그림 같은 방법이 대부분이고 모두 비슷비슷한 방법밖에 없다. 특히 의구심이 있었던 부분인데... 한결 같이 이렇게 설치 하라신다~

위 그림에서 파티션을 분할한 아래쪽 그림과 같이, USB 드라이버의 파티션을 ⓐ로 나누고 앞쪽 FAT32 파티션에는 인스톨 이미지(iso)를 부팅되게 풀어 놓고, "안드로이드를 설치할 장소 ①"에 리눅스와 안드로이드를 설치한 후, 윈도우로 재부팅 하고 드라이버C를 ⓑ로 분할하여 파티션을 만들고 "안드로이드를 설치할 장소 ②"에 ①에 설치한 안드로이드를 복사하여 설치 하고...

그뒤의 남는장소 에는 grub.cfg가 있는 인스톨된 부팅영역을 복사 하고...

다시 C드라이버의 시스템 파티션에 명령프롬프트(CMD)로 들어가서 뭐하고 뭐하고..결국 안드로이드 부팅 을 위하여 이렇게 복잡하게 돌리니 둔지방 마당쇠도 햇갈리우스하고 놀다가 3일동안 낑낑 그렸다능...헐~~~ 돌아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안되는건 아니지만 왜 이리 복잡하게 했는지 지금도 잘~~이해가 안간다.

( 내머리의 한계일 수 도 있다능~ 혹은 옛날버전의 인스툴에는 직접 설치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을 수도!^^ )

여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간단한 방법으로 설치 해 본다.

간략 요약하면

1. 안드로이드를 설치할 C드라이버의 영역을 축소하여 ⓐ와 같이 파티션을 분할 한다.

( 준비한 ①의 USB드라이버에는 안드로이드 인스톨 프로그램을 복사하여 둔다. )

2. 이후 ①의 USB드라이버로 부팅하여( 안드로이드 인스톨 프로그램으로 부팅 ) 안드로이드를 ②에 설치하고 시스템 영역인 ③에는 리눅스를 비롯한 듀얼 부팅의 모든것을 설치한다. ( 내부 MMC드라이버에 설치함으로 설치속도도 매우 빠르다. )

3. 바이오스에서 초기 부팅을 C: 드라이버나 USB로 설정 하듯, 부팅과 관련된 시스템 파티션인 ③에는 윈도우나 안드로이드를 선택하여 듀얼부팅 할수 있게 셋팅 함으로 설치가 완료 된다.

아래 그림으로 부팅되는 과정을 이해한 뒤 실전에 들어간다.

< 부팅순서의 이해>

설치 하기

1. 안드로이드 설치 이미지  다운로드

다운로드 페이지 ( http://www.android-x86.org/download )

공식 홈페이지 ( http://www.android-x86.org/ )

다운받은이미지 iso파일을 알집 같은 압축프로그램으로 풀어놓고 준비된 1GB이상의 USB 를 포맷한다. (16GB로 안되서 32GB로 했다는분도 계시는데 그건 용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다. 15~6년전에 일반 일반 싱글칩으로 USB키보드를 개발한적 있는데 USB는 워낙 속도가 빨라 발진 주파수에 굉장히 예민하다. 이는 약간의 잡음에도 민감 함으로 USB, USB2, USB3이런 단자에 번갈아 가며 끼워 보면 거의 동작한다. 아니면 설치 이미지 프로그램을 잘못 깔았던지...)

초기 부팅하는 것이니 FAT32 로 포맷하여 사용 하던지 NTFS 로 포맷 하던 상관 없다.

이후 이미지를 풀어 놓은 폴더의 파일을 몽땅 USB 드라이버에 복사 하면 준비 끝이다.

필자의 경우 여러 버젼중에 android-x86-4.4-r5.iso가 가장 안정 적이었다.

아래와 같이 폴더를 만들어 각 버전별 iso 파일 압축을 풀어놓았다. 실험해본 버전들 인데...

"부팅안됨"으로 이름 해놓은 폴더가 보이는데 전부 뻥~이다 다~부팅 된다.
다만 다운받은 iso파일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그림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부팅 안되는 이미지 파일에는 .disk와 boot폴더가 빠져 있다.
버젼이 달라도 정상동작 되는 버전에서 두개의 폴더를 복사해서 넣고 부팅 시키면 잘~된다.

보시다 시피 부팅에 필요한 폴더이니 이 폴더와 리눅스의 GRUB를 설치하는 bootia32.efi가 들어 있는 efi 폴더가 ①의 시스템파티션에 설치 된다.

2. C: 드라이버 새 파티션 만들기

파티션을 만들기 위해 MiniTool Partition Wizard를 실행 시킨다. ( 윈도우의 디스크 관리 에서도 가능 하지만 여기서는 설명 생략! )

아래는 MiniTool Partition Wizard를 사용하여 C드라이버를 Move/Resize로 새로운 파티션을 만들때 이다.

C드라이버에서 우측버튼 클릭하여 Move/Resize에서 축소 하여 새로운 파티션을 만든다.

여기에서는 빈 공간을 7GB정도 만들었는데 이 영역을 리눅스 파일 포맷인 Ext2로 만들기 위하여 "Create"하고 파일 시스템은 Ext2, 파티션 이름은 아무거나 만든뒤 반드시 Apply하여 완성 한다.

( ***  MiniTool Partition Wizard는 디스크의 용량을 변경시키거나 새로 만들때에는 반드시 좌상단의 Apply를 실행 시켜야 완성이 된다. 그림으로 쉽게 쉽게 되니까 다 만들어 진줄알고 필자도 가끔 깜빡 거린다. ㅎㅎ)


3. 태블릿PC BIOS 의 부팅순서 바꾸기 CMOS셋팅


C드라이버에서 USB드라이버로 부팅을 바꿔주는 작업은 익히 잘 아실터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좌우간 컴퓨터가 시작 될때 USB로 부팅되게 셋팅 하자.

그리고 BIOS의 셋팅 Security>Secure Boot menu>Secure Boot Support = Disabled 로 설정 하여야 정상적으로 USB드라이버가 부팅이 된다.

4. 안드로이드의 설치


설치메뉴가 부팅되면 첫번째 Live메뉴로 설치하기 전에 안드로이드를 실행시켜 봐도 된다.

현재 까지 가장 최신버전인 테스트용 Android-X86 6.0-rc1이 부팅속도도 가장 빠르고 다른 버전에서는 안되는 볼륨버튼뿐 아니라 기타 센서들도 정상 동작 하는것 같았는데, 구글 플래이 스토어의 앱이 다운로드 되지 않고 가끔 얼음이 되었다가 바위가 되었다가 한다.

앱이야 apk파일 받아서 설치 한다지만 얼음 앞에서는 장사 읎다~ㅎㅎ

3번째 "Installation"메뉴로 안드로이드를 설치한다.

mmc드라이버의 5번째 파티션이라는 mmcblk0p5( MiniTool Partition Wizard에서도 5번째 있었음 )이 포맷된 ext2로 나오니 여기에 설치 하면 된다.

ext2로 넘어가면 포맷하겠느냐 에서 포맷된 것이니 포맷하지 않고 Do not format 하고 아래와 같이 진행 한다.

리눅스GRUB의 설치 "Yes"

EFI Grub2?는 C드라이버의 시스템파티션 ①에 부팅관련 파일을 설치 할것이냐 물어보는것이다. 당연히 "Yes"

부팅영역을 담당하는 시스템 파티션은 MiniTool Partition Wizard에서 그 위치를 찿을수 있다,

다음을 보면 부팅 영역을 포맷 할거냐?고 물어본다. 이런걸 왜 물어보고 그러셔!!!!!!!!!

당연히 "No"합니다. 윈도우 부팅 영역이 날아 갈수도 있습니다. 주의~~

( 윈도부팅 영역은 냅두고 듀얼부팅을 위하여 만들어진 영역만 지운다는 메시지 일수도 있슴! @.* )

시스템 디렉터리를 설치 할까요? "Yes" 하고...

설치 한후 다시 윈도우로 리부팅 한다.

5. 시스템 파티션에 리눅스 GRUB부팅 시키기

간단히 말하면 설치한 USB드라이버에 보면 있는 EFI폴더가 C드라이버의 시스템 파티션에 들어가서 시스템 부팅시에 EFI폴더안의 bootia32.efi파일을 실행 시켜 리눅스OS인 GRUB를 설치하는 것이다.

위 안드로이드 설치할 때에 "EFI Grub2?"에서 "Yes"를 함으로서 설치 전.후의 시스템 파티션이 달라진걸 확인해 보자.

부팅시 GRUB가 설치되면 boot디렉터리를 찿아가서 grub.cfg가 자동으로 실행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딱 하나 수동으로 작업할게 있다.

바로 bootia32.efi를 실행 시켜주는 일이다.

도스에서 관리자 권한으로 명령창 열어서 아래 명령을 타이핑 하셔도 되고 메모장 등에서 아래의 명령어를 입력하고 배치파일 확장자 DuBoot.bat 이름으로 저장하고 마우스 우측버튼 클릭하여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 하세요.

@echo off
echo 반드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하세요!
pause

bcdedit /set {bootmgr} path \EFI\Boot\bootia32.efi
bcdedit /set {bootmgr} description "Dual Boot"
bcdedit /default {bootmgr}
pause

몇줄 타이핑도 구찮고 훑어서 CTRL-C, V도 싫으시면 도리읎다 다운로드

DuBoot.bat

모든 설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전원을 끄고 Usb드라이브로 부팅 했듯이 바이오스 설정에서 "Dual Boot"으로 부팅 되게 셋팅 해 주면 된다.

Boot메뉴에 "Dual Boot"난이 하나 더 생겼다.

"Dual Boot"으로 부팅되게 설정해주면 Windows 나 Android로 선택할수 있는 듀얼부팅 화면이 나온다.

다음은 준비만 하고 안드로이드 설치에는 사용 하지 않았던 Ext2Mgr 와 Notepad++ 를 이용하여 grub.cfg파일도 수정해보고 리눅스 파일포맷인 Ext2의 안드로이드 설치 내용도 살펴 보자~

수고하신 분들 즐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