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독살

삼국지게임/기타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조선 청년 양부하(梁敷河)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부산의 반송 삼절사' 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에는 삼절사(三節祠)가 있다.
삼절사는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집성촌이었다.
조선시대 동래향임과 좌수들 중에 남원양씨가 많았으니, 옛날 남원양씨는 부산의 대표적 양반씨족(兩班氏族: 兩班 -> 고려 때 부터 ‘문반(文班)’과 ‘무반(武班)’ 혹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 ‘문반’과 ‘동반’은 모두 ‘문관(文官)의 가문’을 나타내던 말이고 ‘무반’과 ‘서반’은 모두 ‘무관(武官)의 가문’을 나타내던 말인데 조선 시대 이후 사대부 중심의 계급 체계가 고착화하면서 ‘지체나 신분이 높은 상류 계급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확대되어 동반(東班) + 서반(西班)을 합쳐서 양반(兩班)으로 부르게 되었다.)이었다.
부산의 남원양씨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이 이 삼절사에 모셔져 있으니 양지(梁誌), 양조한(梁朝漢), 양통한(梁通漢) 세 분이다.
지금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것은 부산의 반송 삼절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약력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산의 남원양씨중 숨은 큰 인물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양부하(梁敷河1580~1675)이다. 역사를 좀 안다고 하시분들도 "양부하"라는 이름이 머리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양부하의 일본에서 행적이 임진왜란을 끝나게 했다는 것이다. 양부하가 이들 삼절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삼절사의 간단한 내력을 보자.
★ 양지(梁誌, 1553 ∼ 1592): 경기도 파주인으로 적성현감을 거쳐 경기도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839년 삼절사 건립후 합사하였다.
★ 양조한(梁朝漢, 1555∼1592): 동래향교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성내의 정원루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정랑에 증직되었다 .
★ 양통한 (梁通漢, 1559∼?): 양조한의 아우로서 난을 피하여 두 아들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 중 순절하여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 양부하(梁敷河)는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서 순절한 양조한(梁朝漢 1530∼1592동래향교 훈도로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동래성내 정원루에 옮긴 후 순절. 호조정랑에 증직)의 손자이다.
당시 양조한은 아들 양홍(梁鴻 1555~1592)과 함께 위패를 옮겼고, 이 위패를 지키다가 왜병이 성내에 들자 자결 순절했다. 양부하는 당시 12살이었는데,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당시 양부하의 집은 가마실(釜谷 - 지금의 부곡동)에 있었는데 양조한의 처는 부자(시아버지와 남편)가 숨지자 손자 양태수(양부하의 동생)만을 데리고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의 고향인 밀양 무안면으로 피난을 갔다. 난리중에 양부하의 어머니는 실종되었는데 그 행방이나 성씨까지 실전된 상태이다.
양부하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27년만인 1619년(기미년 )에 39세의 장년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양조한의 부인이자 양부하의 조모는 그의 손자임을 알아보지 못 했다. 조모는 처음에 "내 손자가 아니다."라며 부인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는 이후 96세에 이르도록 장수하는데, 그는 평생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인 95세에 이를 밝혔는데, 그 이야기는 경천동지(驚 天 動 地 )한 것이었다.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독살에 관계한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조선중기의 학자 임상원(任相元: 1638~1697 형조판서 역임)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도 전해온다. 이후 연려실기술과 성호사설, 그리고 일본인 아오나기(靑柳綱太郞)가 쓴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부하는 일본에 강화사신으로 온 명나라 사람 심유경과 모의를 하여 왜적의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그 내용은 이하와 같다.
<< 심유경(沈惟敬, : ?~1597): 명나라의 사신으로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출생하였다. 명나라에서 상인으로 활동하였다가 1592년 인진왜란 때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일본과의 화평을 꾀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평양성에서 신기삼영유격장군(神機三英遊擊將軍)의 신분으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와 만나 화평 상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협상을 재차 진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니고야성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게 된다. 심유경은 이협상에서 농간을 부려 명나라와 일본 양국 사이에 심각한 불신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화평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7년 정유재란(제2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또다시 일본과 평화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기도하였지만 경상남도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만다.
그의 족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심유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 였던 석성이 추천해서 명나라의 장수 조승훈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다. 처음 조선 연합군과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강화 전담의 임무를 띠고 온 심유경은 할 일이 없었으나, 1593년 1월 이여송이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하면서 이여송의 주도 아래 기나긴 강화회담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 바로 일본어에 능한 심유경이 왜군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심유경은 왜군 진영으로 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며 절대 끝나지 않을 강화회담을 시작했는데 양쪽 진영에서는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고니시 유키나가를 설득 직접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으로 건너간 심유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게..
1.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건네준다.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두 조선 왕자를 귀국시킨다.
7. 조선의 권신이 앞으로 일본에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등 이었다. 강화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명나라는 도요토미히데요시에게..
1. 조선에서 완전 철군할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할 것.
..이라는 양국 서로가 도저히 타협점을 찾기 힘든 강화조건을 내건다.
그러자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려는데 동의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자신의 나라에 속여서 강화가 타협 되었다고 전했다...
심유경은 강화조건을 모두 속이고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오직 왜왕으로 책봉되길 바라며 대대로 명나라의 신하로 남아 조공을 바치겠다"라고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보내게 된다.
그때까지도 명나라가 자신이 내건 강화조건을 모두 받아드렸다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책봉서와 금인, 관복을 받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 사이소 죠타이가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분노를 하게 된다.(고니시유키나가 역시 겨우 목숨만을 구제했으며 정유재란에서는 1군이 아닌 2군을 몰고 재침공을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분노는 다시 한 번의 조선 재침공이라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후 심유경의 모든 실체가 탄로나 명나라 황실에까지 전해지며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병부상서 석정이 막아서며 다시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다시 강화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하여 경상남도 의령에서 명나라 양원에게 붙잡혀 처형 당했다.>>
임진란 때에 동래 사람인 양조한(梁朝漢)과 양홍(梁鴻)은 부자지간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쳐들왔을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싸우다가 죽었는데 양조한의 손자였고, 양홍(梁鴻)의 아들인 양부하(梁敷河)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12살의 양부하(梁敷河)는 왜군에게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일본의 왕)에게 헌신하겠다.” 였다. 비록 어렸지만 자신이 살아야만 일본군에 죽은 조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 동래부민의 전몰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럼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야만 된다고 여겼다.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 - 소 요시토시)는 처음에는 이런 글을 쓴(앞으로 일본인으로 살겠다는..) 양부하를 의심하였지만, 그는 일본의 여러 섬을 거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쿄토 후시미성(伏見城)에 양부하를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낼 정도로 믿었다.
히데요시는 양부하를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니 양부하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鮮兒與日本兒同也 敷河垂頭流涕)..
히데요시는 통역하는 왜인에게 명령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 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 새워 양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는다.” 하였다.
이튿날 히데요시는 양부하에게 일본말로 물었더니 양부하가 일본말로 곧잘 대답하므로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히데요시는 그를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秀吉知敷河非賤人。而容貌鮮令。狎而愛之。常置左右。恩意甚厚)
히데요시는 항상 3층 높이에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방석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劍)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머리 위에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한창인데도 히데요시는 별로 할 일이 없었 보였다고 한다. 곁에 근신(近臣) 다섯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히데요시는에게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임진년)에 아들 하나(차남)를 두었다. 히데요시의 아들 이름은 토요토미  히데요리(秀賴:풍신수뢰)였다.
<< 강항(姜沆, 1567~1618)이 지은 간양록(看羊錄)에는 “히데요시의 근신이 히데요시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1596년) 가을에 양부하는 조선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이 심유경(沈維敬)이었다. 심유경은 도요토미와이 강화는 서로의 입장 차이로 도저히 합의안을 낼 수 없었다.
심유경은 이 전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 자신을 보러 온 조선인 양부하를 만나게 된다. 양부하는 도요토미 최측근에서 잔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후 양부하는 심유경과 친해져서 내왕하면서 양부하에게 히데요시를 죽이는 계획을 설명하였고 이에 양부하도 도요토미를 살해 할 모의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왜인들이 심유경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심유경이 크게 곡을 했다. (이는 양부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양부하가 히데요시에게 가서 "관백님. 중국사신이 곡을 합니다."하고 알렸다. 이상하게 여긴 히데요시가심유경을 만나보기를 원하니 양부하가 음실(蔭室=비밀통로)을 만들어 객관에서 궁궐로 몰래 오게 하여, 심유경과 히데요시를 만나게 했다.
유경은 좌석에 앉자마자 환약(丸藥)을 하나를 먹었다. 히데요시와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역시 약을 먼저 먹었다. 이를 본 히데요시가 유경에게 이상히 여겨 물으니 심유경은 “만리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으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합니다" 하였다.
히데요시는 “거짓이 아니냐?” 물으니 심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어찌 하겠소?” 하였다. 히데요시도
“나도 섬에서 돌아와 기운이 줄어든 듯 하니 하나 줄수 있겠냐?”라고 하자, 유경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 속에서 환약을 히데요시에게 주었다.
히데요시는 양부하를 시켜 약을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서(署)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秀吉令敷河取來。置諸掌中。熟玩之。丸有署字)
히데요시는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 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데 그만도 못하다.” 했다.
의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품속에서 이쑤시개(楊子)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너먼저 맛을 보아라.” 라고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꿀꺽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히데요시는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심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다. 실은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서서히 약하게 만드는 약인 것이다.
유경은 히데요시와 헤어지고 난뒤에 재빨리 객관에 돌아가서 다른 해독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아래로 내리게 하였다. ( 華使歸館。必飮他藥下之。再服又下之)
당시 양부하는 심유경과 히데요시 독살에 깊이 가담해 있었고, 이 독살 과정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일본과의 해결책이 쉽게 풀리지 않아 곧 조선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서서히 죽는 과정을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목격한 유일한 인물은 양부하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유경이 준 약을 먹고 난뒤 부터 사지에 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괴이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게 뜸을 뜨라.” 하고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였다.
어느 날 히데요시는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뒤 히데요시는 죽었다.
그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만나 독약을 먹은 것이 1596년 5월이었고, 죽은 것이 1598년 8월이다. 시간이 2년 정도 흘렀으나, 심유경이 쓴 독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히데요시가 노환으로 죽었다고 해도 별 할말은 없지만, 여러문헌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는 분명 독약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독약은 비소 종류를 독으로 썼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 양부하가 직접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히데요시의 내실체재 이후 과정은 양부하가 문지기에서 듣고 기록하였다. (自秀吉處內。敷河不得侍。此則聞諸其人者也)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양부하는 일본 서부의 대명 모리휘원(毛利輝元 - 모리 테루모토)의 사람이 된다.
1600년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모리휘원이 덕천가강(?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뒤 그 관할지가 축소되면서 번세(蕃勢)가 어려워졌다.
마침내 양부하는 모리휘원에게 귀국을 간청하고 모리휘원은 거느리던 조선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敷河間說輝元。請得西歸。輝元曰。吾壤削食少。不得以多養士也。許之)
모리휘원의 귀국문서 노첩(路帖)을 받은 양부하는 주변의 귀국코저 하는 조선인 82명을 모아 대마도를 거쳐 부산 감만포로 돌아왔다. (이 귀국에 대해 노포동 묘비는 100명이라고 했는데 숫자가 틀리고, 귀국포구가 감만포로 기록한 것은 일치한다)
염헌집(恬軒集)의 양부하전(梁敷河傳)에는 “양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돌아온지 57년이 흘러 96세이다" 했다. (時敷河三十九歲。萬曆己未也 。食吾粟者 五十有七年)
또 "그의 말중 지명은 왜어로 구술해, 해독할 수 없어 강항의 간양록을 참조 했다"고 했다. (名地名人。竝用倭語。不得譯而文。以看羊錄)
부산 동래출신의 소년 양부하는 명나라인 심유경과 함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독살하므로 조부 양조한과 아비 양홍의 전몰, 실종된 모친에 대한 복수를 한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으므로써 임진왜란도 끝난 것이다.
이런 쾌거가 당시에 밝혀지지 못한 것은 심유경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화 실패와 독살살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귀국 즉시 처형되었다. 그가 죽을 때 독살공작에 대해 진술했지만, 히데요시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사(明史)에서는 그를 간신이 아닌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양부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다시 열린 평화의 시대에 왜인들이 천하영웅으로 모시는히데요시를 자기가 암살 했다고 밝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57년이 흐른 뒤에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때 사실을 밝힌 것이다.
지금도 많은 한국관광객들이 일본 오오사카성(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업적 전시)을 찾아 관광하는데, 전시장 끝 부분에 필히 있어야 할,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청년 양부하와 명사(明使) 심유경에 의한 암살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사학자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암살부분을 필사적으로 숨겼는데, 이제는 밝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위대한 조선청년 양부하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의 묘가 있는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도로변에 동상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사실 남원양씨 문중도 양부하의 일본내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양부하! 그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쾌거를 이룬 안중근과 다를 바 무엇인가? 그리고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과 비추어 어디 하나 그의 공(功)이 빠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은 알고있고,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폐허로 만든 원흉 적장을 죽인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을 모른다? 이것은 하늘을 보며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암살관련 전말은 일본 경도의 명가 아도가(阿刀家)에 비전(秘傳)하는 문서 '비장인(非藏人)'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거짓 장계로 인해 심유경은 죽었지만(중국에서 충신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히데요시의 광기(狂氣)는 어느나라에도 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히데요시 암살로 계획을 수정하여 조선청년 양부하의 도움으로 목표를 달성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변절해왔다. 드마라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제 그의 신원도 회복해야 한다.
두번에 걸친 왜란을 끝낸이는 조선의 바다를 지킨 이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끝까지 전의를 불 태운 조선의병도 아니었다. 그럼 조선군과 파병 온 명나라군인가?
모두 아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복수에 불타는 조선인 양부하 이 두사람에 의해 임진왜란이 끝났다는 것이다.
양부하의 공은 충무공 이순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조부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그 끝은 조국이 7년간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의사나 윤봉길의사, 김구선생이나 수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과 같이 이 분이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조국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위대한 조선의 청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