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곽재우와 17장수들의 개인별 업적

삼국지게임/기타

현세대가 보기 편하게 순번을 매긴다 공과가 더하고 덜한 의병장수를 뜻함이 아니다

1. 망우당 곽재우 장군(별도의 공적을 등재한바 있어 생략)

2. 영장 윤탁(尹鐸) 장수에 대하여

1554년(명종 9)∼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성원(聲遠), 호는 구산(龜山). 합천 삼가 출신. 언효(彦孝)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정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박사겸(朴思謙)·박사제(朴思齊)·노순(盧錞)·조계명(曺繼明)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많은 공을 세웠다.

정암진전투(鼎巖津戰鬪)에 이어 개령·김산(金山)·지례 등지에 출몰하는 적을 치는 의병장 김면(金沔)을 도와 분전하는 한편, 웅천(熊川)·창원·김해·고성·사천의 적이 진주를 공격할 때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참전하였으며, 1593년 제2차진주혈전에 참가하여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촉석정충단(矗石旌忠壇)에 병향(竝享)되고, 삼가의 구연서원(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3. 도총 박사제(朴思齊) 장수에 대하여

1555년(명종 10)∼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현(景賢), 호는 매계(梅溪). 경상도 삼가 출신. 이조참의 우(優)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은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 권양(權養), 권제(權濟)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삼가의 윤탁(尹鐸)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군사와 합류하여 낙동강 좌안지방의 여러 고을 방위와 수복에 힘써 공을 세웠다.

한때 경상우도 감사 김수(金睟)가 곽재우를 모함하자 격문을 돌려 구원하는 데 힘썼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4. 수병장 오운(吳澐) 장수에 대하여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5. 수병장 이운장(李雲長)에 대하여1541(중종36) ~ 1617(광해군9년)

자는 희서(希瑞)이요, 호는 죽헌(竹軒)이며, 의령(宜寧) 유곡에서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1년(1568)에 좌부장(左副將)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빛나는 의병활동을 하였으므로 전 목사 오운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수병장(收兵將)이란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 의병이 정암진 즉 솥바위 나루를 수비(守備)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입하자
鼎巖津(정암진)에서 倭敵(왜적)을 殲滅(섬멸)하고 戰死(전사)하여 宜寧郡民誠金(의령군민성금)으로 鼎巖津(정암진) 戰死地(전사지)에 殉節戰跡碑(순절전적비)를 建立(건립)했다
그는 무공(武功)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의 증직을 받았다.

6. 수병장 배맹신(裵孟伸)

자(字)는 장숙(壯叔) 호(號)는 력봉(력峰) 만호 휘(諱) 경림(景霖)의 차남이다.
공의 조상은 대대로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세거하였고 천성이 강직하고 기상이 장웅(壯雄)하며 재예총명하였다.
조부게서 정학(庭學)하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동문수학하였다.
공은 부친에게 무예를 익혔는데 그중 궁마술(弓馬術)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조총(鳥銃)을 난사하면서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하자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공등은 분기충전하여 세간리 마을 앞 현고정(懸鼓亭)에게 모여 창의를 맹세하고 북을 두드리며 “국난을 구출하자, 의병에 앞서자, 죽음을 맹세하자.” 하고 외쳤다.
정암진 전투 및 영산, 창녕전투에서 공은 항상 선봉장으로서 홍의장군 곽망우당을 도와 군졸을 지휘하며 왜적을 격멸하여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왜적의 난사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의 선봉장으로서 세운 혁혁한 전공과 국가를 위해 순절한 충절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1677년(숙종31)에 공에게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7. 수병장 심대승(沈大承) 장수에 대하여

1556년(명종 11)∼1606년(선조 39),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보(德甫), 호는 이안(伊安).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박필(朴弼) 등 의령(宜寧) 고을의 장사들과 친족, 하인 등을 모아 의병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진주 싸움 때도 구원군의 선봉장으로 참가하였다.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을 받았다.

8. 독후장 정연(鄭 演)장수에 대하여

삼가현에서 살고있다가 이웃 고을인 의령(宜寧)에서 곽재우 장군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자 곧 달려와서 의병부대의 독후장(督後將)이란 중임을 맡아 빛나는 활동을 하였으며
벼슬은 첨중추(僉中樞)에 이르렀다

9. 돌격장 권란(權 鸞)장수에 대하여

자는 자인(子仁)이요 호는 대수헌(大樹軒)이며 의령(宜寧)출신이다.
그는 곽재우 의병부대의 돌격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가장 용감하게 선두에
빛나는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벼슬은 군위현감(軍威縣監)
그리고 좌참찬(左參贊)의 증직을 받았다.

10.  조군 정질(鄭蛭)장수에 대하여

초계인이며 삼가현 육동에서 살았다. 그는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치밀한 성격과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그리고 이곳 지리에 특히 밝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1. 전향 노순(盧錞) 장수에 대하여

1551년(명종 6)∼미상. 조선 선조 때 의병장.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협(子協), 호는 매와(梅窩). 초계 출신.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을 보고, 박사제(朴思齊)·허자대(許子大) 등과 함께 군사 800여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의령의 곽재우(郭再祐)부대에 합세, 그 휘하에서 군량보급 참모를 맡아 왜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이듬해 영변부사를 지냈다.

12. 치병 강언룡(姜彦龍) 장수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문(汝文), 호는 초정(草亭).

선조 때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항쟁하여 의령·삼가(三嘉)·합천(陜川) 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의령의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13. 전군 허언심(許彦深) 장수에 대하여

1542년(중종37년) ~ 1603년(선조37년) 호는 압호정(壓浩亭)이요. 의령(宜寧)현의 가례(嘉禮)에 살았으며 곽망우당의 매형(妹兄)이었다.

그는 창의기병(倡義起兵)할 때 많은 곡식과 가동(家 )등을 내놓았으며 의병부대의 군향(軍餉)을 관장 했었다. 그는 공로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4. 군기 허자대(許子大) 장수에 대하여

1555년 (명종10년) ~ ? 자는 이화요(而化)요, 호는 평호정(平湖亭)이며 삼가출신이다.

곽재우 의병부대에서 그는 군기(軍器)의 제조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15. 기찰 심기일(沈紀一) 장수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남중(南仲). 만천(萬川)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키니, 이에 가담하여 왜적을 토멸하는 데 힘썼다.

특히 정암진(鼎巖津)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후일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 복병 안기종(安起宗) 장수에 대하여

1556년(명종 11)∼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응회(應會),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였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가 겸전한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고을의 천거로 사옹원봉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판관이 되었다. 나라에 외환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군수물자의 남용을 막고 경비를 절감하여 병기의 수선과 확보에 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화왕산성(火旺山城)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당쟁의 제물이 되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으나, 원래 행상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죽은 뒤에 논공행상에서 공적에 비하여 포상이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7. 군관 조사남(曺士男) 장수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능(百能).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고 의기가 있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흩어지니, 경상도 일대가 적군에게 유린되었다.

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5, 6일 만에 창녕·현풍·의령·영산 등지가 모두 적군에 의하여 분탕되자 지방 의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의령·창녕·현풍·삼가·초계·합천 등지를 전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지산(砥山)싸움에서 순국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승지에 추증되었다

18. 군관 주몽룡(朱夢龍) 장수에 대하여

1561년(명종 16 신유)~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금산군수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흩어지는 백성을 모아 병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니 적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 등 경상도지역에서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도 강덕룡·정기룡 의병장과 자주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삼룡장군(三龍將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 한때 임천·청양·대흥(大興) 등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때 반군들은 성세(聲勢)를 올리기 위하여 유명한 인물을 들어 동사자(同事者)로 선전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한때 연루자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죽은 뒤 형조판서에 추증되고 태인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