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 난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고 2년 뒤(1594년)에 두명에 서자출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한양에 사는 송유진과 충청도 홍성에 사는 기울어져가는 왕족의 서자 출신에 이몽학이다. 두 번에 반란으로 인해 선조는 거듭된 잘못된 판단을 하게된다....
1. 송유진(宋儒眞)의 난
1594년 임진란이 일으난 2년 뒤인 갑오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과도한 부역과 과세로 피폐해진 남부지방에선 유민들이 속출하고, 왜군과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친 수 많은 군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험조한 곳에 매복하거나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특히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과 호서 지역에서 이런 도적떼가 성행했는데 수령들이 군사를 풀어 토벌해도 일시적인 대책일뿐 곧 다시 모이곤 해서 소탕에 몹시 애를 먹었다. 그때 상황을 <선조실록 47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선조실록으로 본 송유진의 난을 글로 옮겨 보겠다.
1) 선조 27년인 1594년 1월 8일
충청도에 도적이 치성하니 감사에게 잘 조치하라고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충청도 내에 도적이 점차 성하여 부자로서 조금이 나마 재곡(財穀)을 저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창고를 봉해 놓고 쓰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조짐이 우려됩니다. 내부의 급박함이 외적에 못지 않으니 은밀히 감사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미를 살펴 특별히 조처하여 후환을 근절하게 하소서.”
당시 송유진(宋儒眞)은 나이가 30세였고 한양에서 양반에 서자 출신이었다. 그는 저자거리에 무뢰배로 전쟁(임진란)을 틈타 군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사족(士族: 서울로 가서 벼슬을 하다가 정치적 격변기에 본향(本鄕)·처향(妻鄕)·외향(外鄕)을 따라 낙향하여 재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계층), 무인 일부를 끌어 모은 무리를 이끌고,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주변의 다른 도적떼들을 규합하며..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며 왜군과 싸우는 의병대장이라 자칭하였다..
어느 정도 세를 불리는데 성공한 그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등에 그들을 배치했다. 그러다 동료 '오원종'에게 도성의 수비가 허술하단 말을 듣고 일당들과 모의해 1월 10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아산, 평택 지방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약속한 다음 광해군이 이끌던 분조(分朝)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냈다.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 현재 하남성 기현(淇縣). 고대 중국 상(商)나라의 주왕(紂王)과 반란군 주 희발(周 姬發-무왕(武王)) 마지막 전투 장소)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 고대 중국 은나라 말기에 사람)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湯武: 하(夏)의 걸왕(桀王)을 몰아낸 탕왕(湯王)과 은(銀)의 주왕(紂王)을 몰아낸 무왕(武王))에 빛이 되리로다.
송유진(宋儒眞) 일당의 모의는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에 의해 조정에 보고 된다.
2) 선조 27년(1594년) 1월 11일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송유진 역모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충청도 조도 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柳徵)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木川)에 사는 교생(校生) 석경천(石擎天: 당시 14살)이 「천안(天安)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宋望器)·준기(俊氣)와 그의 아비 송흥수(宋興壽)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同郡)의 유춘복(柳春福)·송연복(宋年福)·박순개(朴順介)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同郡) 사람들에게, 적장(賊將)의 성(姓)은 이씨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靑溪山)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春川), 해주(海州)에 각각 1진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조정에선 병기를 관리하는 관리인 송망기(宋望器)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민감히 반응해 즉시 선전관(宣傳官: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형명(刑名), 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 시위(侍衛)?전령(傳令), 부신(符信: 나뭇조각이나 두꺼운 종이에 어떤 글자를 쓰고 도장을 찍은 뒤에 이것을 두 조각으로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게 주고 한 조각은 보관하였다가 뒷날 그것을 서로 맞추는 것으로써 어떤 약속된 일의 증거로 삼은 물건.)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武官職))에게 금군을 딸려 파견해 송망기(宋望器)를 추적하게 했다.
병사 변양준(邊良俊)과 순변사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이 있는 지역을 순찰하면서 기회를 보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한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적을 수색하기 위해 방어사 변응성(邊應星)에게 순찰을 핑계로 은밀하게 청계산 일대를 정찰할 것을 지시하였더.
해서민을 보살피기 위해 당시 황해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유홍(兪泓)에게도 이 사실을 즉각 전달해 도내 군사 훈련 상황과 병기 제작 현황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하게 하고, 황해병사 조인득(趙仁得)을 시켜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날뛰던 도적떼를 긴급히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발빠른 대응이 무색하게 다음날 송유진(宋儒眞) 과 그 일당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다.
3) 선조 27년(1594년) 1월 12일
송유진(宋儒眞) 등을 체포한 임달신·홍응개 등을 시상하다
적정(賊情)을 진고(進告)한 사람인 직산 좌수 임달신과 적장 송유진(그외 심희수, 오원종, 유춘복, 김천수등)외 10명을 체포한 사람인 홍응개·홍난생·홍우·신계축·홍찬·김응추·홍각등에게 차등 있게 상직(賞職)하였다.
송유진(宋儒眞) 과 그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선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송유진(宋儒眞) 이 난을 일으키며 판서를 사칭했는데 선조는 이것이 그의 위에 다른 수괴가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이에 성문과 한강의 경비태세를 더욱 철저히 할것을 명하는 한편 남산위에 군사를 보내 사방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병부는 장사들을 뽑아 대오를 나누어 대기하게 했으며 각종 병기를 숫자로 헤아려 궐내로 반입하게 하고 병기의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와 왜군이 군량을 쌓아놓던 용산창에도 군사를 배정해 지키게 했다.
어느 정도 조치가 치해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구구한 논쟁이 벌어진다. 사헌부에선 죄인들을 즉시 서울로 압송할것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송유진(宋儒眞) 일당을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변고가 생길 수 있고 (선조 생각처럼) 그 곳에 적의 괴수가 있다면 압송을 미루고 군사를 풀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선다.
선조는 사헌부의 손을들어 선전관, 금군, 금부도사를 파견해 수로를 통해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해오게 한다.
죄인들이 압송되어 오기 며칠전인 1월 17일, 비변사에서 의병장 이산겸(충청지역 의병장으로 토정 이지함의 서자)을 반군의 수괴로 지목한다.
4) 선조 27년(1594년) 1월 17일
비변사에서 송유진(宋儒眞) 역모의 괴수로 이산겸(李山謙)을 지목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초사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보령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李山謙)인 것 같습니다. 산겸(山謙)은 일찍이 의병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산겸(李山謙)은 충청도 보령출신으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의 서자로, 임진년에 조헌(趙憲)의 의병군에 참여했으나 2차 금산전투(錦山戰鬪)에는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헌 군(趙憲 軍)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온 인물이었다.
왜군과의 싸움에선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몇번이나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나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송유진이 한창 난리 피울 때는 그는 전라도에 있었다. 보령출신 이씨가 자기 혼자만 있는것도 아닌데 의병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있어 역적수괴로 지목 되었다....
이산겸(李山謙)의 체포명령이 떨어지고 1주일 뒤 대궐뜰에서 송유진(宋儒眞) 일당의 국문이 시작된다.
송유진(宋儒眞)은 반란수괴는 이산겸(李山謙)이고, 자신은 아이들 모아놓고 훈장 노릇하다 어쩌다보니 말려들었다고 발뺌했으나 그러나 다른 주모자 격인 김천수(金天壽), 오원종(吳元宗), 유춘복(柳春福)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宋儒眞)으로 밝혀진다.
이날 선조는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李山謙)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宋儒眞)이 진짜 괴수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홍우(洪瑀), 홍근(洪瑾: 송유진의 일당이었으나 마음 바꿔 송유진을 체포한 사람)도 이산겸(李山謙)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하였다.
5) 선조 27년(1594년)1월 25일
다시 열린 국문에서 '도성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사 1천 명으로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라고 바람넣은 사람은 오원종이며 침술이 뛰어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그가 사람들 끌어들이는데(혹은 낚는데) 활약 했음이 드러났다.
2차례에 걸친 국문끝에 송유진 일당이 말만 번지르르 할뿐 그저 규모가 좀 큰 도적떼에 불가하며 그나마도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선조는 그들을 모두 능치처참에 처하고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분배했다.
남은건 송유진 일당에게 속았거나 허위진술로 억울하게 연류된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등의 처리 문제였다.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석방하였다. .
6) 선조 27년(1594 년) 2월 6일
그러나 송유진 역모와 관련된 죄인 이산겸 등을 친국하다
(중략)
(의병이 좀처럼 모이지 않아)동궁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담양을 거쳐 김덕령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나를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내가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내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우리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산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유진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을 제대로 가려내기 위해 불러올린 홍근등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선조 본인 입으로도 괴수는 송유진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7) 선조 27년(1594년) 2월 14일
충청도 도적(송유진 역옥)과 관련된 죄인을 친국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지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의병 모집)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선조) 이르기를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선조)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로 돌아가겠는가. 송적(송유진)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후 이산겸은 압사(모래에 묻어 고문하는 것)·낙형(불에 달군 쇠붙이로 몸을 지지는 것) 등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으나 사실은 그가 의병장으로서 이름이 나 죽은 것이었다.
선조는 그가 무죄임을 알고도 죽였고, 바닥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잘못된 판단을 했다. 선조는 역적입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거 뻔히 알면서 철천지 원수인 왜군과 싸운 의병장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린다. 일본 장수들이 해야 할일을 조선왕이 대신 팔 걷어 붙이고 하고 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임금이 말이다..
2. 이몽학의 난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낙향한 왕족의 서얼 출신이다. 그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지역 사람이다. 왕족이라, 그리고 서얼이라서 조선이라는 사회에서는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개인적으로 나라에 반란을 했으니 당연 그렇게 평하리라 생각됨.) 그는 끝내 그의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기울어져 가는 왕실의 서자가 임진왜란 중에 반란을 일으킨다. 바로 이몽학의 난이다.
임진왜란 때 그가 충청도에서 종군할 때에 조련장관(操練將官)이 되었다. 그는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머물면서 뒷날 반란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당시 조정에서는《기효신서(紀效新書:명대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병서)》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다.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庶人)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였다.
**. 척계광(戚繼光-1528년∼1588년:명나라 장군)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명대(明代) 해상무역 봉쇄로 인해 명과 조선의 해안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었다. 척계광(戚繼光)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조선의 이순신만큼이나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사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중국에선 만력위국조선전쟁(萬曆爲國朝鮮戰爭)이라 부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무비(武備)를 소홀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선조(宣祖)가 한성(漢城)을 버리고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서야 겨우 명(明)의 구원군을 맞게 된다.
1593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선조가 제독영에 직접 찾아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지난 전투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이겼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자 이여송이 대답하길 “앞서 온 북장(北將) 조승훈(祖承訓)은 여진족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전쟁에 불리하였으나 지금 제가 와서 사용한 병법은 곧 왜적을 방어했던 척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했기 때문에 전승(全勝)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은 기마병인데 비해 남방 왜구들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전술이 달랐던 거다. 이여송 제독은 척계광(戚繼光)의 무예와 전술로 훈련된 남방의 절강군(浙江軍)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이여송이 군사비밀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선조는 역관(譯官)에게 몰래 영(令)을 내려 이여송 휘하를 매수하여 그 비급을 구한다. 그리고는 유성룡(柳成龍)에게 책을 보이며 해독하게 했으나 군사(軍事)를 모르는 그도 알 길이 없었다. 하여 토론을 거듭한 끝에 병법과 무학에 밝았던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추천 받는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해독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여송 휘하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의리가 있어 유성룡에게 “우리 명군이 돌아가면 조선이 홀로 어찌 지키겠소? 그러니 명군이 돌아가기 전에 기회를 봐서 군사 조련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권한다. 이에 유성룡이 서둘러 한교를 낭관(郎官)으로 삼고 70명의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낙상지 휘하 병사 10명을 교관으로 삼아 밤낮으로 창(槍), 검(劍), 낭선(狼?)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이들이 조선군에 척법(戚法)을 가르쳐 왜적들과 싸웠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군은 척계광(戚繼光)의 사(射, 궁수), 포(砲, 총포수), 감(?, 창검수)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배우고, 1595년에는 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 호대수(胡大受)에게서 직접 삼수군(三手軍)이 훈련을 받는다. 한교 역시 유격장군 허국위(許國威)에게 창법(槍法), 패법(牌法), 선법(?法) 등을 물어 척계광(戚繼光)의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를 따로 모아 책으로 편찬하니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武藝書) <무예제보(武藝諸譜: 선조 31년-1598년)>다.
이와 영조35년(1759년)에 만들어진 '무예신보(武藝新譜)'를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등이 보강하여 4권 4책으로 '무예24반(武藝二十四般)'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종합적인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 **.
그들은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부대에 소속되어 충청도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심이 이반하여 백성들이 탄식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고, 크고 작은 고을의 방비가 모두 허술함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한현(韓絢)은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이몽학(李夢鶴)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무량사(無量寺)의 굴 속에서 중들과 함께 깃발과 무기를 만들었다. 그때 충청도에는 흔히 동갑회(同甲會)를 만드는 유행이 있었다.
"동갑회(同甲會)란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甲年)을 써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친목 모임이다."
이몽학(李夢鶴) 등은 그들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사람들을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이와 같이 무량사(無量寺)에서 군대를 모은 후 출병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치 대장군처럼 깃발을 세우고 의자에 앉아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미리 정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선동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그들에게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무리들은 모두 좋다고 환호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추앙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승려와 무리를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높은 관직을 나누어주니, 벼슬을 하지 못한 양반 자제와 양반의 서자 그리고 마을 무뢰배들이 모이 시작하였다.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전 준비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 이몽학(李夢鶴)은 1597년 7월 6일 밤에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승려 능운(凌雲)·사노 팽종(彭從) 등과 함께 1천여명의 반란군을 동원하여 홍산현(鴻山縣: 부여군 홍산면)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은 데 이어 또 임천군수(林川郡守)박진국(朴振國)도 사로 잡았다.
이들은 모두 항복하여 이몽학(李夢鶴)에게 붙었으므로 이몽학(李夢鶴)은 그들을 높은 빈사로 대우했다.
그들은 7월 7일 정산(定山: 청양군 정산)을 함락시키니, 현감 정천경(鄭天卿)은 몸만 빠져 도주하였다.
이어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 충남 청양군)을 함락하자 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주했고..
9일에는 대흥(大興: 예산순 대흥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3일 후에야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李時發)은 홍산에서 일어난 변란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합동작전을 펴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반란군은 거사 3일만에 6개 고을을 함락시켰 기세가 대단하였다. 수령들은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반란군의 호령에 따랐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반란군을 대접하였고 다투어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란군의 수는 한때 수 만명에 달하였다.
반란군은 “의병대장 김덕령·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돕고, 병조판서 이덕형이 한양에서 내응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나라 전체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리게 되었다.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 같은 자는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었다. 그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하였고, 반란군이 도착하자 모든 공문서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또 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예 그의 동생 3인을 반란군에게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은 짧은 기간에 6개 군현을 점령하자 용기백배하여 “이 기세를 몰아 곧장 한양으로 향하자”라고 큰소리 쳤다.
그래서 부근에서 제일 큰 고을인 홍주목(홍성)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원래 이몽학(李夢鶴)의 모사였던 한현(韓絢)은 영악스럽고 꾀가 많았다.
그는 이몽학(李夢鶴)에게 “승승장구하는 바람을 타고 곧장 서울로 침공하는 것이 상책이요, 주위의 성곽 없는 약한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견고한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현(韓絢)은 초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고 없었는데, 이몽학(李夢鶴)은 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곧장 홍주를 공격하다가 대패하게 되었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찍부터 명망이 높았으며, 행실이 청렴결백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홍주목사에 제수되자 정성을 다해 방어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래서 왜적이 홍주성에 쳐들어오자 단번에 무찔러 흩어지게 함으로써 충청도 지역을 안전하게 지켜낸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반란군의 침입을 당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을 모으는 한편, 그곳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박명현(朴名賢)과 전 병사 신경행(辛景行) 등을 불러 성을 지킬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우선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청야작전이다.그대로 놓아두면 적군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홍주목 인근의 남포 횬감 박동선(朴東善)은 변란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려 수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사 최호(崔浩)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고 난색을 표했다.
박동선(朴東善)은 큰 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따지는가”고 윽박지른 끝에, 드디어 수영(水營)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홍주목을 후원하였다. 또 보령현감 황응성(黃應聖)도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합세하였다.
홍주성은 이들 구원병을 얻자 크게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밤이 되자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에 횃불을 벌려 성에 세워 성 안팎을 환히 밝히고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반란군은 관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기세를 올리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어둠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몽학(李夢鶴)은 “한현(韓絢)이 오게 되면 목사의 머리를 베어서 깃대에 매달아놓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이튿날에는 군대를 이끌고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 길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장차 김덕령·홍계남의 군대와 합류하여 곧장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떠벌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도중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 틈을 노려 박명현(朴名賢)·최호(崔浩) 등이 바짝 반란군을 추격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또 전주 판관의 부하였던 윤성(尹誠)이 적진에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다”고 선무공작을 했다.
연속적인 패배로 반란군은 더이상 이몽학(李夢鶴)의 말을 믿지 않고 각자 자기들의 살 길만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중 김경창·임억명·태근 등 3인이 배신하여 이몽학(李夢鶴)의 막사로 난입해 누워 있던 그의 목과 사지를 베어 토벌군인 홍가신(洪可臣)한테 받친다. 토벌군으로 참여하렸든 김덕령은 이몽학(李夢鶴)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덕령은 군대를 돌린다.
이몽학(李夢鶴)이 죽자 반란군은 일시에 흩어져 버린다.
머리와 수족이 잘린 이몽학(李夢鶴)의 시체는 소금에 절여 한양으로 압송되어, 종로 철물전 앞에 3일 동안 효수된 후 사방으로 보내 전시되었다.
이몽학(李夢鶴)의 책사 한현(韓絢)은 반란군의 실패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군으로 도망쳤다가 면천군수 이원(李援)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그는 결국 능치처사에 처해졌는데, 심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었다.
한현(韓絢)의 아들 한의연(韓毅然)은 역시 당고개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삼촌인 이익과 김양호의 삼촌인 김환생, 한현의 조카 한호연 등은 모두 삼수와 갑산 지역으로 귀양갔다.
이몽학(李夢鶴)이 살던 집은 파가저택되었고, 그가 살던 홍산현은 혁파되고 말았다. 이때 능지처사당한 사람이 33명이었으며, 서울로 송치된 자는 1백여명이었다. 처형된 자들의 가족든 모두 법에 따라 연좌시키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진압되자 조선 정부는 반란 수뇌부의 집을 늪이나 논으로 만들어 버리게 하고, 연루자 색출을 마을 단위로 철저하게 진행한다.
이과정에서 특별히 반군에게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도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한다.
감독 선조, 주연 정철의 작품인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처럼..
(☆. 기축옥사의 더 많은 자료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45)
임천군의 전태수, 박진국은 한술 더 떠서(자신도 반란군에게 투항한 주제에..) 반란군 가담자들을 근거없이 고발해서 이러한 피해를 더욱 키워버리고 만다.
조정에서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졸개 중 한 명이 "최담령(崔聃齡: 의병장김덕령 휘하에 부장), 홍계남(洪季男: 안성지역 의병장이자 토벌군의 장군 중 한명), 김덕령(金德齡: 전라도 지역의 병장)"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誣告: 없는 사실을 꾸며서 남을 고발·고소함)했다.
그리고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함경도 영원군수) 등을 모두 끌고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대부분 무고였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는데, 김덕령(金德齡)만이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이봉학(李夢鶴)의 난을 처리하는 과정에 토벌군 신경행(辛景行)의 모함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죽음으로 내몬다. 무과에 당당히 급제한 정식 장수인 신경행(辛景行)은 후방에 배치되어 비정규군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평소 불만이었다.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다는 죄명으로 평소 불만이 많았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체포하였고, 마침내 8월 4일 반란수괴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압송당하여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우의정 정탁(鄭鐸) 등의 구명, 탄원노력에도 불구하고 형문은 계속되었다.
1596년 8월 21일까지 보름이 넘도록 선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그에게 6회 연속으로 직접 형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몽학(李夢鶴) 반란이 의병들을 사칭하여 역모를 꾀한 것 때문에 김덕령(金德齡) 같은 의병장 출신 인사들을 이 때 부터 눈에 가시처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柳成龍)은 김덕령(金德齡)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西人)인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金德齡) 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20여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金德齡)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춘산곡>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김덕령(金德齡)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崔聃齡)은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평생을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김덕령(金德齡)은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죄가 죄인지라 사후 무덤을 문중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金德齡)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金德齡)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수령들도 탄핵을 당하였다.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지경을 침범하지도 않았는데도, 제 스스로 먼저 겁을 내어 그의 하인들이 반란군에게 무기를 실어보내는데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반란군이 쳐들어와 문서를 펴놓고 읽을 적에도 그대로 듣고 있다가 마치 애걸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엿다. 이 때문에 그는 처벌을 받았다. 임천군수였던 박진국(朴振國)과 홍산현감이었던 윤영현(尹英賢) 등은 뚜렷한 처벌 조항이 없었지만, 수령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반란군에게 협조한 죄목으로 치죄하게 하였다.
홍산의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서울로 잡아오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그가 현지에 머무르면서 반란군의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난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대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하여 승지 유희서(柳熙緖)를 보내 반란군의 협박에 못이겨 협력한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선포하여 나머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포상했는데,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자들도 모두 공신으로 인정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국왕을 호위한 관원들은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봉하였고, 명나라에 군량을 주청하러 간 신하들과 왜적을 무찌른 장군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았고,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관원들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봉하였다.
이몽학(李夢鶴) 의 반란을 진압한 청난공신 가운데 홍가신(洪可臣)은 1등,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는 2등,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는 3등에 봉해졌다. 이몽학(李夢鶴) 의 목을 벤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 태근(太斤)등은 이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종 2품에 해당되는 당상관급인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 "이몽학의 난"은 영화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만들어 졌다. 역사와는 좀 차이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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